계속 밤이라도 괜찮아, 새벽이 올 때까지 네 손을 잡고 걸을게

 

 

[로브 루치 X 파울리 / 길잡이.]

 

W.잭모리스

 

 

 

 

 루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길을. 어디를 어떻게 흘러들어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가로등하나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밤길을 걷는 중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두운 골목길. 그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어렴풋하게 실루엣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벽과 벽. 사이로 빠지는 길은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외길인 듯 했다. 그래서 대체.

 

대체 여기가 어디냐?”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치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아는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우악! 여전히 품위 없는 목소리를 낸 상대의 목줄기가 손아귀에 잡힌다. 그 목을 조르기 직전 그는 간신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뭐야, 네 녀석이었나.”

 

너 이 자식, 사과부터 해! 사과를!”

 

갑자기 나타난 쪽이 잘못이다.”

 

 뻔뻔하게 답한 루치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턴다. 그에 상대가 한층 더 열받아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그는 상관치 않았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냐. 파울리.”

 

무슨 소리야. 쭉 같이 있었잖아.”

 

 그랬었나? 루치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아, 그래. 그는 일이 끝나고 술을 한잔 하러가기로 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브루노의 술집에 가는 길이었겠지. 벌써부터 치매냐며 폭소를 터트리는 파울리의 얼굴을 밀어 입을 다물게 한 루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래서, 여긴 어디지?”

 

그거야 네놈이 알겠지.”

 

우악스럽게 짓눌린 코가 삐뚤어진 것 같다며 파울리가 툴툴거리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길을 잃은 건 넌데 왜 나한테 물어?”

 

 옆에서 벅벅 뒷머리를 긁는 소리가 들려와 그는 손쉽게 파울리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분명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품위 없이 머리를 긁고 있겠지. 그런 루치에게 다시 질문이 돌아온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건 너다. 아는 길이면 잃어버렸겠...”

 

 잘 생각해봐. 말을 끊고 파울리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조금 묘한 음성이다. 평소라면 지금쯤 발끈하면서 달려들었을 녀석이 차분하게 다시 물어오는 음성에 루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는....”

 

 3번 부두 뒷골목이군. 주변을 살펴보던 루치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 길게 이어진 어두운 외길. 단지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했을 뿐 헤맬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대로 죽 걸어 골목에서 꺾으면 브루노의 술집이 나온다. 3번 부두? 한번 되물은 파울리가 이내 그의 의견에 긍정했다.

 

그래, 3번 부두네. 네 말대로.”

 

가자.”

 

 루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위치도 방향도 확실하니 겨우 어둡다는 이유로 망설일 일은 사라진다. 뚜벅뚜벅. 걷는 그의 곁에 자박거리는 가벼운 운동화소리가 함께했다.

 

걷는 길은 묘하게 적막했다. 발걸음 소리 외엔 이렇다 할 생활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조용한 길이었던가, 고민해본 루치는 이유를 알아챘다. 조용한 건 주변이 아니라 파울리였다. 좁은 길이기에 오른쪽 뒤에서 한발자국 떨어져오는 파울리는 평소답지 않게 조용하다. 귀 기울여 발자국 소리를 들어야만 뒤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정도였다.

 

파울리.”

 

그래서 루치는 드물게 제가 먼저 파울리를 호명했다.

 

?”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루치는 자신의 단어선택에 모멸감을 느꼈다. 뭐가 다행이지.  

 

아니다.”

 

싱겁기는. 루치의 부정에 파울리가 심드렁히 이야기한다.

 

 둘은 다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파울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보다 반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다. 무거운 굽소리를 내는 워커에 비해 파울리의 운동화는 가볍고 소리가 옅다. 그래서 루치는 그가 아직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했다. 그는 이 이유 없는 불안감이 불쾌했다.

 

파울리.”

 

?”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두 번째 파울리를 호명하고 만다. 즉각 들려오는 대답에 부정한 루치는 도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번엔 파울리가 가만히 넘어가주지 않았다.

 

뭐야, 너 무섭냐? 설마 무서운 거냐? 무서운 거구만!”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등짝을 내려친 파울리가 제멋대로 파안대소 한다. 인상을 찌푸린 루치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채 열 걸음도 가기 전, 뒤에서 뻗어온 파울리의 손이 제멋대로 남의 손을 잡아 깍지를 잡아 낀다.

 

, 손이라도 잡아줄까?”

 

 떨어져라. 루치는 파울리를 떼어내려 노력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억지로 떼어낸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일반적인 조선공으로서의 최대치였다. 더 이상 힘을 썼다간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한숨 쉰 루치는 결국 파울리와 손을 잡은 채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서 술잔을 쥐는 것이 손을 떼어내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꽤 걸은 것 같은데도 브루노의 술집으로 갈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루치가 그렇게 물으려 했을 때였다.

 

, 저기 봐. 도착했나.”

 

 파울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루치는 이 끝없던 골목 끝에서 밝게 켜진 가로등을 보았다. 그리고 가로등이 비추는 그 갈림길, 그 끝에선 익숙한 브루노의 술집이 보인다.

 

어두워서 거리감각을 잃어버렸었나보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술을 한잔하고 쉴 수 있겠다 한숨처럼 말하는 루치에게 그러게, 하는 대답이 들려온다. 조금 더 신이 날 줄 알았는데, 헤매다 도착한 만큼 호들갑을 떨며 달려 나갈 줄로만 알았던 파울리의 대답은 의외로 덤덤했다.

 

설마 고작 그만큼 걸었다고 벌써 지친 건 아니겠지.”

 

하하하, 그럴 리가 있냐.”

 

가서 시원하게 맥주나 마시자구. 그렇게 말하며 깍지낀 팔을 힘차게 휘두르는 파울리는 아직도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아래에 도착한다면 표정을 확인 해봐야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치는 대수롭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갈림길에 도착한다.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는 갈림길부터 그 너머의 술집까지는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럼. 갑작스러운 빛에 눈살을 찌푸린 루치가 파울리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다 왔네.”

 

그렇게 말한 파울리가 여태 제멋대로 끼고 있던 손깍지를 푸르고 물러난다.

 

뭐냐.”

 

, 네 녀석은 앞으로도 잘할 거야. 여태도 그래왔잖냐.”

 

다른 사람들이랑도 좀 어울리고, 폭력적으로 좀 굴지 말고.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파울리가 어울리지 않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무슨. 어이없어하는 루치에게 파울리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팡팡 등을 두드린다.

 

헛소리 말고 얼른 마시러 가지. 이런 식으로 굴면 앞으론..”

 

은근히 힘이 실린 손길에 절로 허리가 숙여진 루치가 짜증을 내며 숙인 허리를 폈을 때, 파울리가 등을 밀었다. 안녕. 그런 인사가 들린 것도 같다고 루치는 생각했다.

 

안 어울리는 청승이군.’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돌아본 뒤에 파울리는 없었다.

 

이봐! 이쪽이야 이쪽!”

 

여기도 부상자다!!”

 

 시야는 여전히 암흑이었다. 훅 들이쉰 숨엔 매캐한 연기가 포함되어있어 반사적으로 코를 막으려 팔을 들어 올린 루치는 품안에 묵직한 무언가가 안겨있음을 알아챘다.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것. 그것이 사람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루치! 괜찮은감?!”

 

이내 우수수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함께 나타난 건 카쿠였다. 눈부신 시야에 눈살을 찌푸린 루치는 목소리로 카쿠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빛에 적응한 눈이 주변 사물들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래.”

 

빛이 들어오는 건 카쿠가 천장을 덮고있던 파편을 치워냈기 때문이었다. 벽이 무너진 건지 휘어지고 끊어진 철근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파편들. 그는 그런 파편들의 용케 피해간 작은 공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파울리는 괜찮은가?”

 

카쿠의 질문에 루치는 처음으로 고개를 위가 아닌 아래로 향했다. 사고가 났을 때 겹쳐 쓰러진 듯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파울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냄새가 난다. 루치는 냄새를 맡은 후에 파울리의 가슴을 뚫고 나온 철근을 보았다.

 

휘어진 철근은 등에서부터 가슴을 완전히 관통한 채, 그의 가슴에 아슬아슬하게 닿아있었다. 그보다 먼저 꿰뚫린 장애물이 있었기에 남은 부분이 닿지 않은 듯하다. 루치는 손을 들어올렸다. 빈손아귀에선 깍지를 끼고 있던 굳은살이 박힌 단단한 손의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네 녀석은 앞으로도 잘할 거야. 여태도 그래왔잖냐.’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을 봤어야만했다고, 회색 먼지가 쌓인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루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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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고백, 첫 데이트, 첫 섹스.

 

 

 

[아이스버그 X 스팬담 / 질문 642번, 부고를 작성하라.]

 

W.잭모리스

 

 

 

 

내가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제안을 수락했을 리가 없다. 저 비열한 시장 녀석이 저녁으로 마신 와인에 무슨 짓을 했을 거라며 스팬담은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체스나 한판 어때? 지는 사람이 소원을 들어주는 거지.’

 

! 그 말 후회하게 해주지. 내가 체스만 몇 년을...!’

 

 그는 그렇게 자신했던 한 시간 전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체스만 몇 년은 개뿔! 실력을 자랑하는 자신에게 큰일이군. 하며 인상을 찌푸렸던 아이스버그가 체크메이트를 통보한건 고작 20분만의 일이다. 한판 더! 라고 외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결과는 33.

 

사기꾼 자식...!”

 

 욕지거리를 내뱉은 스팬담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린다. 그러지 않고선 이 상황을 버틸 재간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안 되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 뒤로 뻗어온 손이 스팬담의 팔을 풀어 올린다. 잊은 지 오래였던 새카만 밤 속에서 한쌍의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마주한다. 그 시선을 피해 스팬담은 슬쩍 몸을 밀어 올렸다.

 

조심.”

 

 그런 도망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이스버그는 침대 헤드에 머리가 부딪히기 직전, 스팬담의 허리를 도로 끌어당긴다. 전직 조선공의 힘에 어린애마냥 끌어내려진 스팬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일어나려는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는 손은 그를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잠깐.”

 

침대에선 협상 안 하는 타입이라. 미안.”

 

 그러나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스버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린다. 미안하면 멈추라고 미친놈아! 그러나 스팬담이 항변하기 전, 이미 입구에 문질러지고 있던 살덩이는 기어코 비좁은 틈을 파고든다. 고통으로 움츠러드는 스팬담에 덩달아 아이스버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

 

 쌤통이다. 용케 힘들어 보이는 얼굴을 분간해낸 스팬담은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너도 아파야지. 아마 그는 조금 킬킬 웃었을 것이다. 맞붙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 아이스버그가 몸을 숙여 속삭인다.

 

힘 빼.”

 

 금방 끝날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손은 엉덩이를 쥐고 벌리고 있었다. 금방? 솔깃한 스팬담이 잠시 긴장을 푼 사이였다.

 

“-!”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단단한 살덩어리가 허락도 맡지 않고 제멋대로 밀고 들어온다. 불시 간에 씹은 혀도 얼얼한 엉덩이도 아파 스팬담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그래도 이제 끝난 건가?

 

끝났.....”

 

아직, 조금만 더 넣으면 되겠네.”

 

 그리고 아이스버그는 스팬담이 그 말을 알아듣기 전, 몸을 일으켜 강하게 성기를 치어 올렸다. 으악! 스팬담이 품위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기어코 뜨뜻한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눈을 깜빡이자 시야는 한층 맑아졌지만 스팬담을 오히려 그것을 후회했다.

 

이제.”

 

 잠시 참아내듯 멈춰있던 아이스버그가 가슴팍에서 옅게 떨리는 허벅지로 손을 옮긴다. 엉덩이에서 오금까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 올리면서도 시선은 스팬담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무릎 안쪽을 받쳐 든 아이스버그는 나른하게 웃었다.

 

준비는 끝났고시작해도 괜찮지?”

 

“...? 야 지금 뭐...”

 

 스팬담은 그가 지금 매우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깐, 소리 지르려던 입은 다가온 입술에 막히고 만다. 불행히도 안다고 해서 그의 미래가 바뀌는 일은 없었고 아이스버그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발, ...개새끼야! ...내가 너를, 반드시.., 넣고...말겠어.”

 

 아이스버그가 얕게 쳐올릴 때마다 스팬담은 끊어지는 음성으로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자꾸만 위로 도망가는 몸을 도로 끌어내리는 시간은 이미 지났고, 그의 머리 위엔 침대헤드에 박지 않도록 베개를 대준 친절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침대 위에서 하는 욕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나이는 아닐 건데.”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그 친절을 베푼 당사자에겐 더 이상 베풀어줄 친절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오기에 받힌 스팬담의 거친 언사에 아이스버그가 입매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일 움직일 수 있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을 뿐이야.”

 

 빠듯하게 안을 채우고 있던 살덩어리가 아주 느릿하게 빠져나가는 느낌에 스팬담의 목뒤로 옅게 소름이 솟아난다. 오톨도톨하게 올라오는 소름 위로 숨결이 내려앉자 스팬담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이스버그는 그 위로 몇 번이고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쵹, . 가벼운 키스와 느릿한 움직임에 스팬담은 기어코 그 원흉의 손목을 그러쥔다. 땀으로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이 손목에서 팔뚝까지 방황하며 올라오는 것을 아이스버그는 친절하게 들어 목뒤로 둘러준다.

 

그리고 천천히 빠져나가던 속도가 무색하게 단번에 퍽, 쳐올렸다.

 

흐어,.”

 

 그 갑작스러운 자극에 스팬담은 급히 숨을 삼켰다. 조금의 틈도 없이 빠듯하게 맞물린 내벽이 조여든다. 아이스버그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다. 그르렁거리듯 만족스러운 숨소리가 목 안쪽에서 울려 퍼진다. 버티지 못하고 떨어진 손이 방황하다 베개를 쥐어뜯었다.

 

, 아 십..!”

 

 간신히 신음을 삼키는데 성공한 스팬담이 붉어진 눈매로 눈을 치뜬다. 어지간히 고집스럽네. 웃을 자제력이 남아있지 않은 아이스버그는 그런 스팬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 점이 귀엽지만.’

 

 중증이다. 그렇게 판단한 아이스버그는 뭉근하게 안쪽을 내리눌렀다. 흐윽. 숨을 들이쉰 스팬담이 입술을 깨문다. 뾰족하게 선 그 입술에 입 맞춘 아이스버그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소근거렸다.

 

소리 그냥 내는 게 어때? 어차피 나밖에 안 듣잖아.”

 

네놈이니까 참는 거다! 마음대로 해줄 거 같아?!”

 

엄머, 남들 앞에서 내고 싶...”

 

 닥쳐! 소리 지른 스팬담이 베개를 들어 어깨를 내려친다. 그럼 계속 참아보던가. 말한 아이스버그가 잠깐의 휴식은 그만두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치고 나갈 때마다 스팬담의 눈앞은 점멸을 반복한다.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술을 무는 스팬담을 보며 아이스버그는 가슴 아래 어딘가에서 응어리진 감정을 느꼈다. 동정심과 가학심이 동시에 끓어오르는 그 모순적인 감정에는 붙일만한 이름이 없다. 풀 곳 없는 답답함에 이를 악문 아이스버그가 스팬담의 허리를 쥐고 힘껏 찔러 올렸다.

 

..!”

 

 한숨처럼 토해지는 신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아이스버그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손가락을 비집어 넣는다.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엄지가 제멋대로 입안을 헤집었다. 덕분에 삼키지 못하는 침에 스팬담이 인상을 찌푸린다. 뭐하는 짓이냐, 시선으로 묻는 스팬담에게 대답해주지 않은 채, 아이스버그는 움직임을 계속한다.

 

, 아흑....., !”

 

 타액과 신음이 섞여 흐른다. 끊어버릴 듯이 손가락을 물어뜯어보아도 몸을 두드리는 성기에 금새 도로 입술이 열렸다. 수치심과 쾌락의 열이 퍼진 얼굴로 스팬담이 숨을 삼킨다.

 

으아, -, ! -.”

 

 아이스버그는 남은 손으로 스팬담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움직였다. 손가락을 치워내고 싶은 듯 손목을 움켜쥔 손이 떨린다. 마주 닿은 아랫배 사이가 젖어드는 느낌이 났다.

 

흐윽...!”

 

 그리고 순간, 바들바들 떨리는 엉덩이 한쪽에 깊게 우물이 패인다. 스팬담에게서 넘친 뜨끈한 액체가 마주 닿은 아이스버그의 배 위로 쏘아졌다가 다시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절정을 겪은 몸 안쪽이 경련하듯 움직이며 그의 성기를 조인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아이스버그는 다시 한 번 세차게 내리 꽂았다.

 

 눈앞이 하얗게 번진다. 최고점까지 치솟은 쾌감이 파도처럼 그를 휩쓸었다.

 

 몇 번 더 잘게 추켜올린 아이스버그가 몸을 멈춰 선다. 울컥, 그때마다 밀려드는 액체가 몇 번이고 안을 적실 때마다 이미 절정을 끝낸 스팬담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하아.”

 

 이를 악물고 있던 아이스버그가 천천히 숨을 뱉어낸다. 그 정도의 움직임에도 한껏 예민해진 스팬담이 어깨를 움츠렸다.

 

 늘어져있던 스팬담이 혀로 손가락을 밀어낸다. 이번엔 아이스버그도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체크하듯 턱을 이리저리 매만져보던 스팬담은 마침내 숨을 완전히 고른 후, 입을 열었다.

 

헤어져, 씨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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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가 도착한 건 그날 아침이었다.

 

 

 

[아이스버그 X 스팬담 / 질문 642번, 부고를 작성하라.]

 

W.잭모리스

 

 

 

 

“...가 죽었답니다.”

 

칼리파가 그렇게 전했을 때, 스팬담은 살짝 덜 익힌 스크럼블에그와 바짝 구운 소시지, 그리고 생크림을 듬뿍 올린 핫케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달각. 소시지를 자르던 손이 멈춘다.

 

누가?”

 

아이스버그가요.”

 

오늘 아침에 들어온 소식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멀다고 스팬담은 생각했다. 장관? 칼리파의 부름에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손은 여전히 멈춘 채였다. 시간과 침묵이 한 몸처럼 흐른다. 옆에서 대기하던 칼리파는 재촉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해드릴까요. 성희롱이지만.”

 

안경을 치켜 올린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서야 정신을 차린 스팬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는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죽었다는 거지 그녀석이?”

 

.”

 

다음 소식.”

 

스팬담의 요구에 칼리파는 할 일을 재개했다. 팔랑, 서류가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다음 소식입니다. 하루는 짧고 그가 처리해야하는 일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밤사이 쌓인 정보들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스팬담은 썰어낸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임펠다운 근처에서 이상해류가 발생하여...”

 

식당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간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칼리파가 자료를 읽어주는 소리. 그 사이에서 스팬담은 종종 결정하거나 질문을 던지며 천천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스크램블 에그에 간이 약하군. 내일은 소금을 더 치라고 해야겠어.’

 

이상입니다.”

 

아침보고는 정확히 그가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끝이 난다. 평소와 다름없는 양을 섭취한 스팬담은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던 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

 

목적어도 주어도 없는 질문에 칼리파가 반문했다. 성희롱입니까. 식탁 위로 사용한 냅킨을 올려놓은 스팬담은 덤덤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사인이 뭐래? 질문의 대상을 알아챈 칼리파가 덮어둔 서류철을 도로 열었다. 팔랑팔랑, 한참을 넘어간 서류가 어느 장에서 멈춘다.

 

사고사랍니다.”

 

그렇군.”

 

대답한 스팬담은 일어섰다. 작업공의 실수로 배가 무너졌는데 그 아래 시민 아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이는 구했지만. 칼리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대리석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소음 방지 패드라도 붙이라고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스팬담은 혀를 찼다.

 

장례식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해본 스팬담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얼굴은 비춰야겠지.”

 

그럼.”

 

스케쥴을 조정하기 위해 칼리파가 수첩을 펼쳐들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일정사이로 장례식에 방문할 틈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는 칼리파를 보며 스팬담은 의자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오늘 워터세븐으로 출발하는 가장 마지막 열차로 잡아둬.”

 

? 그럼..”

 

딱히 업무시간까지 빼서 가야할 정도의 사이가 아니지. 우리가.”

 

갔었다고 방명록에 남길 정도면 충분해. 대답한 스팬담은 집무실로 걸음을 옮긴다. 길게 늘어진 일정 가장 끝에 하나를 더 추가한 칼리파가 그 뒤를 따랐다. 화환은 어떻게 할까요. 칼리파의 질문에 스팬담은 적당히 알아서 하라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어차피 그 녀석들 내가 보낸 건 바로 쓰레기통에 쳐 박을 테니까.”

 

그렇군요.”

 

그렇게 쉽게 긍정하지 마!!”

 

순순히 긍정하는 칼리파의 태도에 스팬담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쩌렁쩌렁 복도에 울리는 신경질에 칼리파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성희롱입니다. 하고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것으로 그 주제에 대한 대화는 끝이었다.

 

 

닿아야만 쓰라린 얇게 베인 상처처럼, 아이스버그의 부고는 말없이 그의 하루를 따라다녔다.

 

짜바랍! 재브라가 급사 캐서린에게 또 차였다!”

 

후쿠로 너 이 새끼!”

 

문 좀 부수고 다니지 마라.”

 

서류를 처리하면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그리고 아무것도 아닐 때에도 문득 다시 생각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인의 부고였다. 그들이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해도 신경 쓰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

 

스팬담은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평가했다. 본디 애정으로만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다. 그의 사랑엔 증오가 따라 붙었고, 자신의 사랑엔 과거가 따라붙었다. 집게를 든 스팬담은 각설탕을 쌓아올린다.

 

허술하게 쌓인 아래와 다르게 위로 갈수록 견고하게 천천히.

 

그렇게 쌓아올린 각설탕 탑은 꽤 멋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아주 조금 각설탕을 올리던 손이 흔들렸을 뿐인데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저분하게 무너진 탑을 보며 그는 집게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시작했더라?’

 

톡톡. 생각에 빠진 스팬담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장관님, 치워드릴까요? 장관님.”

 

내버려둬.”

 

그렇게 말한 그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구겨 넣었던 추억처럼 미간이 옅게 찌푸려진다. cp들이 문을 닫고 집무실을 나섰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시작을 붙잡았다.

 

워터세븐의 응접실이었다.

 

좋아해. 스팬담.”

 

사법의 섬 유지보수 재계약을 위한 방문했던 그는 교섭 중간, 휴식시간에 차나 한잔 하지 않겠냐는 아이스버그의 제안에 따라 응접실에11 독대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사나운 얼굴로 커피만 노려보고 있던 스팬담은 폭탄선언에 혀를 씹었다.

 

그래... , ?!”

 

정작 폭탄을 터트린 당사자는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편안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아이스버그는 부러 오랫동안 찻잔에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엄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상대가 속이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툭 한마디를 던진다. 확답을 받은 스팬담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 , , ..!”

 

완성되지 못한 단어들을 쏟아내는 스팬담을 보면서 아이스버그는 제 고백의 여파를 구경했다. 후하후하. 한참만에야 숨을 가다듬은 스팬담은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그대로 멈춘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군.’

 

그렇게 생각한 아이스버그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스팬담이 다시 입을 연 건 그가 차를 모두 비웠을 때였다. 어깨가 들썩이던 스팬담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아이스버그는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으핫하하하! 이 몸을 좋아한단 말이지!”

 

그래.”

 

그렇다면 지금 당장....”

 

참고로, 고백을 수락하지 않으면 재계약은 하지 않을 거야.”

 

내게 무릎을......?! 어째서!”

 

기세 좋게 소리치는 스팬담을 꺾은 아이스버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좋아하니까. 그 고백에 스팬담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게 좋아한다는 녀석의 태도냐! 좋아한다면, 그 뭐냐, 내게 매달려야지!!”

 

사랑해달라고 빌어야하는 게 정상이 아니냐며 소리를 지르는 스팬담의 앞에서, 아이스버그는 태연하게 코를 후볐다. 그건 싫어. 단호한 태도에 스팬담이 답답한 가슴을 쳤다. 저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빌어도 받아줄까 말까한 판에! 그러거나 말거나 새끼손가락을 티슈에 쓱쓱 닦아 마무리한 아이스버그는 몸을 당겨 일어나 앉았다.

 

거절시 사법의 섬 유지보수 재계약은 물론이고 앞으로 갈레라는 해군선을 만들지 않을 거다. 물론 해군 측엔 그쪽이 원인이라고 말할 거야.”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협박이었다. 해군선의 85%가 갈레라에서 건조된다. 해군뿐만 아니라 세계정부 전체의 80%이상이 그랬다.

 

그런데 그걸 중지하겠다고? 그것도 자기 이름을 팔아가며?’

 

어이가 없어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입을 쩍 벌린 채 그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듣고 있던 스팬담은 주머니에서 진통제를 꺼내들었다.

 

, .”

 

고맙...겠냐!!”

 

통째 입에 넣고 탈탈 터는 그에게 아이스버그가 미지근한 물을 따라 건넨다. 버럭. 소리를 지른 스팬담은 일단 약부터 삼킨 다음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거절시 일어날 일에 관하여.

 

그렇게 된다면 분명 세계 정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당장에 압박을 가하겠지. 아이스버그에게. 그리고 원흉이 된 자신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역사에 새겨질 자신의 이름이 파스스 흩어지는 환영에 스팬담은 아득 이를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불리했다.

 

“...좋아한다는 녀석이 협박이냐!”

 

그렇지.”

 

스팬담의 고함에 아이스버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그쪽의 쓰레기 같은 부분까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곤란하거든.”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좋아해. 스팬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좋아해의 연타에 당황한 스팬담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다. 생각보다 귀여운 반응이군. 그렇게 생각한 아이스버그는 턱을 매만졌다.

 

뭐 그렇다고 여기에서 끝낼 생각은 없지만.’

 

그는 조선공인 동시에 노련한 정치가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척, 잠시간의 틈을 준 아이스버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당연히 거절이다!”

 

당당하게 소리치고 사법의 섬으로 돌아간 스팬담이 제 발로 돌아와 사귀어 주겠다며 허락한 건 고작 보름만의 일이었다.

 

시발 그것도 고백이라고!”

 

다 지난 일을 이제 와 울컥한 스팬담은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각설탕이 눈처럼 흩뿌려지는 가운데 처리한 서류와 처리 중인 서류가 한데 섞여 팔랑팔랑 떨어진다. 시발. 뒤늦게 후회했지만, 정말로 늦은 후회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순순히 연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관님, 지금 밖에 워터세븐 시장이...”

 

잔다고 해!”

 

장관님, 시장에게서 전화가...”

 

나 없다!”

 

고백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스팬담은 스팬담이다. 아이스버그가 재계약 취소와 세계정부의 함선건조 취소를 철회한 후, 스팬담은 줄기차게 그를 피해 다녔다. 일차적으로 방문 거절하기부터 자는 척, 바쁜 척, 없는 척. 무시하기까지. 온갖 치사한 방법을 동원한 스팬담은 일종의 우월감이 생긴 채였다. 아무리 거절해도 찾아오거나 아이스버그는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남긴다.

 

그래,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지.’

 

당당히 어깨를 편 스팬담은 위병에게 도개교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오랜만에 산책을 할 작정이었다.

 

무슨 일이냐!”

 

도개교가 무너졌습니다!!”

 

도개교가 무너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랬겠지. 와르르 무너진 도개교와 당황한 위병들 사이에서 홀로 새하얗게 탈색된 스팬담은 이마를 짚었다.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수리했는데!!”

 

수리를 어디서 했는데?”

 

당연히 갈레라....,장관님!”

 

이마에 핏줄을 올린 스팬담은 당장 전보벌레를 찾았다. 꾹꾹. 때리듯 번호를 누르고 기다리자 잠시 후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 워터세븐 시장실...

 

당장 아이스버그 바꿔!”

 

어린 여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분통이 터진 스팬담은 고함을 질렀다. 그 새끼가 감히! 당장 바꿔! 이건 반역죄야! 알아?! 소리를 지르는 그에 반해 수화기 너머는 말이 없었다. 분노를 터트린 스팬담이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자 느리게 눈을 꿈뻑인 전보벌레가 어린 목소리를 전한다.

 

-...시장님은 현재 바쁘다고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짜 이래도 돼요? 엄머, 나는 티라노를 씻겨야 해서 무척 바빠. 전화가 끊기기 직전 수화기 너머로 두런두런 수다가 들렸다. --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스팬담은 두통을 호소했다.

 

아이스버그, 이 개새끼! 반역죄로 쳐 넣어버리겠어!”

 

당장 CP9을 소집해! 소리친 스팬담은 기어코 월보를 이용해 절벽을 넘었고, 도착한 워터세븐에서 저녁만찬(을 빙자한 데이트)을 하고 나서야 문제가 생긴 부분은 무상으로 갈레라 측에서 처리해주겠다는 확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데이트가 한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종종은 그가 찾아가 점심을 함께하기도 했다. 공식석상에 가는 길을 함께하거나 휴일을 함께하기도 한다. 반 협박으로 시작했던 고백과 다르게 아이스버그는 그에게 무언가 강요하지 않았고 스팬담은 금방 거기에 적응했다.

 

애정이 불처럼 따듯한 것이라면 불씨가 옮아 붙는 것은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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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리는 쓰레기 집하장에 서있었다. 청소부들이나 입을 법한 새파란 점프 수트를 입은 모습은 한 치의 위화감도 들지 않아 천직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 점이 파울리는 불만이었다. 감쪽같은데? 동료하나가 킬킬 웃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둘러본 파울리는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감시카메라를 보며 중지를 세웠다. 치직-작은 이명과 함께 무전이 날아들었다.

-눈에 띄는 짓 좀 하지 마.

네에, ."

화면을 보고 있었던 건 동료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얌전히 중지를 접은 파울리는 화풀이로 쓰레기봉투를 걷어찼다. 바스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파울리.

제 상사의 호명에 어깨를 으쓱한 파울리가 두 손을 들어 올려 알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1분 전입니다. 기계음 같은 카운트에 품안을 뒤진 파울리가 종이더미를 꺼내들었다. 눈앞에 있는 건물의 도면이었다.

-도면은 제대로 외웠지?

눈감고도 찾아갈걸요.”

오버하기는. 내용은 핀잔이었지만 마음이 놓였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이었다. 라이터를 꺼내 몇 번 찰칵이자 다행히도 단번에 불이 붙는다. 그 김에 파울리는 담배도 한 대 피워 물었다.

-정말 혼자로 괜찮겠어?

, 그래봤자 증원은 없을 거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면서 뭘.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사과가 떨어진다. 미안하다. 대신 이번일 끝나면 휴가 보내줄게. 그 말에 파울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짜요? 진짜? 며칠? 얼마나?”

-엄머, 라스베가스까진 못 가게 할 거야.

그럼.. 하고 말끝을 흐리는 파울리에게 상사가 못을 박았다. LA도 카지노도 안돼. 파울리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30. 다시 카운트가 울린다. 담배를 건물 외벽에 비벼 끈 파울리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은박지를 벗겨낸 껌을 입에 넣었다. 15. 몇 번 씹지 않아 딱딱하던 껌이 금방 말랑해진다. 짜악-, 경쾌한 소리가 났다. 5. 그는 작업복과 같은 색의 캡 모자를 집어들었다.

-4.3.2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문 안 쪽 복도가 정전이 지나가듯 잠깐 반짝였다.

“1.0. 진입합니다.”

모자를 눌러쓰며 파울리는 그 안으로 향했다.

'파티는 25층 최상층에서 열려. 초대장이 있어야하지만, 자선행사라 접근이 어렵진 않을 거야. 타겟은 10분 전 저택에서 출발, 현재 교통상황을 고려했을 때 15분 정도면 도착할 거다.'

복도는 비어있었다. 짝, 짜악 제가 씹는 껌소리가 울릴 정도의 적막한 복도를 파울리는 느긋하게 걷는다. 왼쪽, 오른쪽 무전의 안내보다 한발 먼저 방향을 트는 그는 누가 봐도 미적거리는 직원정 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코너를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고 서있다.

-행운을 빈다.

마지막 무전이었다. 할일을 마친 수신기를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파울리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다행히 더 올라타는 사람 없이 문이 닫힌다. 20층. 객실청소원이 갈 수 있는 최상층을 누른 그는 타겟의 정보를 되뇌였다.

'다르디안. 32세. 182cm. 아랍계. 현재 친환경에너지에 투자중.'

언제부터 핵에너지가 친환경에너지로 바뀌었는지. 파울리는 혀를 찼다. 오늘의 그의 목적은 무기 밀수업자와 그의 접선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파티장까지 가봐야지.'

초대장이 있었더라면 편했겠지만, 그들이 접선 소식을 접한 건 바로 그제 아침이었다. 신분을 위조할 시간도 초대장을 구할 방법도 없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마는 결국 개인재량에 맡겨버리는 정보부에 파울리는 이를 갈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누군가 두고 간 듯 청소도구가 담긴 트레이를 마치 제것처럼 끌며 복도를 움직인다. 청소요망. 팻말이 걸린 문앞에 도착한 파울리는 객실문 안쪽에서 대기했다.

그가 찾는 것은 적당한 키의 벨보이였다. 움직임이 한정된 청소원에 비하여 그들은 호텔의 곳곳에 동원된다. 언제나 손이 부족한 파티장에서 움직이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존재. 한명쯤 없거나 더 있어도 괜찮은 역활이란 흔하지 않다. 얼마를 그렇게 숨죽이고 있었을까. 텅 빈복도에 벨보이가 지난다. 자신과 비슷한 키. 심부름을 가는 듯 와인병을 든 모양새에 파울리는 쾌재를 질렀다. 파티장에 진입할 핑계까지 완벽하다. 대상이 지나가기 전 파울리는 문을 열어젖혔다.

"으악!!! 당신 뭡니까?! 부딪힐뻔....!"

급작스럽게 열린 문에 부딪힐 뻔 했던 벨보이가 와인병을 안은채 역성을 낸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사과한 파울리는 한차례 주변을 살핀 후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불길한 앞날을 예상한 건지 문고리를 잡고 버티던 벨보이였으나 부질없는 반항이었다. 파울리는 벨보이의 목을 졸랐다. 손톱을 세운 손이 부질없이 작업복을 긁는다.

컥, 커억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후 파울리는 초를 쟀다. 3.5초. 부실한지 생각보다 빨리 힘이 빠지는 몸을 들쳐메고 객실 안쪽으로 향한다. 비치된 바스가운의 허리끈을 풀러낸 파울리는 가장 먼저 벨보이의 눈을 가렸다. 그 후엔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유니폼을 벗겨낸다.

"좀 끼네."

아무래도 이번엔 눈대중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벗겨낸 유니폼을 갈아입은 파울리가 타이트하게 붙는 핏에 두어번 팔을 휘두른다. 다행히 움직이는 데엔 별 무리가 없었지만 튿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신경을 써야할 듯했다. 혀를 찬 파울리는 이불에 둘둘 만 벨보이를 옷장에 쳐박았다.

-젤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확인학 이름을 익힌 후, 화장실로 들어간 파울리는 왁스를 들어 헝크러진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는 김에 잔소리를 듣던 수염도 말끔하게 깎아내고 눈을 내리깔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인상이 완성된다.

"신발이 좀 아쉽군."

진짜 젤다가 발이 큰 편이라면 양말을 구겨넣어 신었겠지만, 아쉽게도 신발은 파울리가 신기엔 작은 쪽이었다. 뒷굽을 구겨신는 걸 고민해본 파울리는 차라리 신고 온 운동화 쪽을 택하곤 객실을 나선다. 떠나기 전 팻말을 청소중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25층, 파티가 열리는 홀 앞에는 가드들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지?"

"심부름인데요."

자연스럽게 지나치려던 파울리느 그들의 질문에 들고있던 와인을 들어보였다. 부족하다고 연락이 와서. 파울리의 태연한 변명에 의심스런 눈빛을 한 가드 하나가 주방에 무전을 날린다. 그러나 파티중에 한팜 바쁠 주방이 연락을 받을리가 만무했다. 두번, 세번. 무전을 보내던 가드가 혀를 찬다.

"들어가봐."

결국 포기한 가드에게 파울리는 까딱 목례를 건넸다. 홀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두세걸음 걷자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그 즉시 파울리는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와인병을 내려놓았다.

"어디..."

타겟은 어디있을까. 그는 익숙한 유명인사들 사이를 헤집었다.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샴페인이 든 쟁반을 대신 받아들자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다. 음식을 권하듯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를 몇번, 마침내 그가 타겟을 찾아낸 건 옥상정원에서였다.

사진으로 몇번이고 확인한 얼굴. 다행히 아직 접선은 시작되지 않은 듯 그는 혼자다. 파울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저, 샴페인....으앗!"

권하듯 내민 쟁반을 실수인 척 크게 흔든다. 길고 가는 잔의 특성상 세워진 잔들이 무너지는 것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순식간에 온몸에 술을 뒤집어쓴 상대가 인상을 찌푸린다.

"너..."

"괜찮으십니까?!"

"되었다."

타겟이 무언가 따지고 들려 했지만 그보다는 가드들이 빨랐다.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에 달려온 가드들이 손수건을 들어 타겟의 옷을 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이미 흠뻑 젖은 몸을 닦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너! 가드들이 미처 소리치기 전에 파울리는 넙죽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몇번이나 비굴하게 허리를 숙이는 파울리의 사과에 웅성웅성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 상황에서 화를 낼 순 없겠지. 주목받는 상황에 아득 타겟이 이를 가는 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진다.

"객실에 여분의 옷이 비치되어있으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됐어."

씹어삼킬 듯한 목소리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에 파울리가 의심할 사이도 없이 타겟이 등을 돌린다. 그 뒤를 다른 웨이터가 따르려하는 것을 파울리가 제가 책임지고 가겠다며 나서려던 때였다.

"너 말고, 너 따라와라."

멈춰선 타겟이 파울리를 콕 집어 지명하더니 다시 발을 옮긴다. 이게 웬 횡재냐. 쾌재를 지른 파울리는 웨이터를 밀쳐내고 위풍당당하게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준비된 게스트룸의 문앞에서 타겟이 멈춰선다.

"먼저 들어가라."

문을 연 타겟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 사람 좋은 석유부자라고 했는데, 어딘가 정보가 틀린 거 같다. 파울리는 제게 주어진 정보를 정정했으나 의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소문과 다른 사람들은 무궁무진했다. 잘 나가는 신사가 더러운 취미를 즐기고 있었던 적도 있었고, 소문이 자자한 약쟁이가 알고보니 멀쩡한 음험가였던 적도 있었다.

'...이자식은 어느쪽이지.'

"너희들은 대기."

최악의 상황이락 해봐야 남색가인 정도일까. 그래봐야 손도 대지 못하게 할 자신이 있는 파울리는 가드들을 물리는 타겟을 보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이상을 감지한 건 침대 위에 묶인 인영을 발견했을 때였다. 아랍계 호인상의 남자. 182cm. 방금 전 자신이 샴페인을 쏟은 그 남자가 침대 위에 있다. 그럼 자신이 끌고 들어온 건...

"젠장!"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파울리는 뒤를 돌았지만 이미 객실문은 닫힌 후다. 느리게 걸쇠까지 걸어 잠군 타겟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정말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방해를 하는 군. 갈레라."

목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간 남자가 천천히 타겟의 얼굴을 벗어던진다. 루치. 익숙한 얼굴을 보며 파울리는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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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은 오랫동안 방치되어있었다. 부서진 문고리. 난장판으로 흩어진 세간은 분노한 사람들이 그곳에 왔었음을 증명한다. 바닥을 나뒹구는 떨어진 서랍은 비어있었고, 액자는 조각났으며, 그 안에 들어있던 단체 사진은 몇몇의 얼굴만을 뜯어 놓은 채 사라졌다. 그 이후로는 그저 시간만이 뽀얗게 쌓인 방. 그 방을 누군가 다시 찾은 것은 아주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끼익.

 

녹슨 경첩소리가 인사를 대신한다. 그러나 방문객들은 아주 조심스러워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열린 줄도 모르게 다시 문이 닫히고, 달빛이 고작인 상황이 되고서야 그들은 쓰고 있던 가면과 망토를 벗었다.

 

필요한 것만 챙겨.”

 

가장 처음 입을 연 건 루치였다. 엉망인 방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는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침대위로 엉덩이를 내린다. 그는 한때 이 방의 주인들 중 하나였으나, 이제는 타인의 용건에 어울려주었을 뿐인 사람 같았다.

 

반면, 카쿠는 퍽 복잡한 표정으로 그가 앉은 침대를 응시했다. 바닷물이 들이쳤던 모양인지 검게 핀 곰팡이와 하얗게 오른 소금기로 뒤덮인 침구는 그가 직접 골랐던 것이다.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 아쉬워한 카쿠는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 남아있을지는 모르겠구먼.”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찾던 것들이 모두 남아있을 것을 확신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인 그들이었던 만큼, 중요한 것들은 침입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었다.

 

책상 뒤의 벽, 콘센트를 뽑아내자 생긴 안쪽의 빈 공간. 곳곳에서 치밀하게 숨겨진 제 흔적들을 하나씩 수거한다. 그날 갑작스러운 작전 종료로 챙기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런 카쿠를 기다리는 루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다.

 

그에게 이 방은 의미가 없었다. 남긴 것이 없으니 챙길 것도 없다.

 

그래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전보벌레였다. 아주 오래 먹이를 공급받지 못해 죽어가는 전보벌레. 축 늘어진 그 벌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간헐적으로 벨레.’ 하고 울었다. 부재중 연락이 있었다는 소리다.

 

누구지.’

 

지령은 각자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전보벌레로 이루어졌다. 아니면 브루노의 술집을 통한다. 그런 그들에게 방안에 둔 전보벌레는 장식용 그 이상도 아니었다. 호기심. 루치는 남겨진 메시지를 듣기로 했다.

 

-호롯호.

 

상비하던 간식을 전보벌레에게 내밀자 제 것을 빼앗긴 핫토리가 구룩구룩 불만스러운 소리를 낸다. 심술을 부리듯 전보벌레를 쪼는 핫토리를 말린 루치는 수화기를 들었다. 최소한의 기운을 차린 전보벌레가 입을 연다.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여보세요? 나다.

 

메시지를 남긴 건 아주 의외의 사람이었다. 전보벌레의 입을 빌려 방안을 울리는 목소리에 짐을 챙기던 카쿠는 손을 멈췄다.

 

-요즘 정신없이 바빠서 말이지. 아쿠아 라구나 때문에 아주 온 도시가 비상이야. 어쩐지 수위도 이전보다 높아진 것 같아서 무너진 도크들을 재건하는 김에 지대를 좀 더 높이기로 했다. 물론 그것도 도시 수복이 끝난 이후지만. 덕분에 대패를 만져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지 뭐냐. 명색의 목수인데 매일 목장갑을 끼고 벽돌을 나르고 있어. , 금방 끝나겠지. 명색이 갈레라 아니겠어? 그럼 다음에 다시 전화하마.

 

메시지는 그렇게 끝이 난. 도로 조용해진 방에선 핫토리조차 울지 않는다. 지금, 그거-하고 카쿠가 입을 떼려고 했을 때였다.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여보세요? 도시 수복이 대충 끝났다. 사소한 게 남아있지만, 그 정도는 뭐 알아서들 하지 않겠냐. 3번가 핫도그가게는 아주 멀쩡해. 맛도 포함해서. 주인양반이 대비를 단단히 하고 갔던 모양이지. 하하. 내일부턴 부서진 도크 수리에 들어간다. 그럼.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여보세요. 1번 도크에서 사고가 있었어. 기중기가 무너졌는데, 그게 내 탓이라지 뭐냐. 아씨. 수리비를 갚기 전까진 술은 꿈도 못 꾸겠군. 어디 가서 마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외상값이 10만베리정도 있었는데....뭐 끝난 얘기인가. 빛을 덜었군.

 

-네 번째 메시지입니다. 오늘 1번 도크에 신입들이 들어왔다. 신입이라고 해봤자 다른 도크 애들을 당겨온 거지만, 덕분에 7번 도크엔 햇병아리들이 넘쳐난다. 얼굴만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데 크하하. 내가 아주 믿음직한 고참이라니까? 한동안은 재미있을 거 같아. 그럼.

 

-다섯 번째 메시지입니다. 갈레라에서 퍼핑톰 2호 제작을 시작하기로 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메시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언가 깨달은 듯 잠긴 목소리로 끊어질 때도 있었지만, 메시지의 대부분은 신이 나있었고, 담담하게 오늘 하루를 자랑하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누군가에게. 애초의 목적도 잊은 채 그렇게 얼마를 듣고 있었을까.

 

-스물여덟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는 내용이 없었다. 스물여덟 번째라고 소개한 이후로 전보벌레는 입을 닫았다.

 

? 오류인건가. .”

 

조금 기다려봤지만 그러고도 한참, 이어지는 침묵에 카쿠가 고개를 기울인다. 메시지 재생이 끝나면 끝났다고 말을 할 터인데. 혹 죽어버린 건가 전보벌레를 살폈지만 벌레는 제대로 두 눈을 뜬 채였다. 그럼 왜. 수화기를 건들려는 카쿠를 루치가 막는다. 다시 한참의 침묵, 침묵, 그리고 그 후.

 

-...., 대체 왜 배신한 거냐.

 

전보벌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취한 듯 부정확한 발음으로 푸념하듯 메시지가 시작된다.

 

-함께 오랫동안 배를 만든 사이지, 우리는. 그런데 왜... 사실은 첩보부원이라고? 처음부터?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지! 동료인척 거기서 끝냈어야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냐. 진심이 있기는 했었던 거냐!!! , 대체 왜...

 

푸념에서 시작해 분노를 토해낸 메시지는 이윽고 후회로 끝이 난다. 전보벌레는 이제 울음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참고 삼켜내는 울음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다시 다음 메시지가 이어진다. 루치는 처음으로 이 방에 들어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서른 다섯 번......벨레....

 

지건.”

 

곧게 뻗은 손가락 아래 단단한 등껍질이 부서진다.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전보벌레의 시체를 보면서 카쿠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한 거 아닌가. 어차피 곧 죽을 전보벌레였으니 그때까지는 두었어도 좋았을 걸.”

 

불필요한 미련이다.”

 

그런 카쿠의 말을 단박에 잘라낸 루치가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점액질이 묻은 제 손을 닦으며 먼저 방안을 나서는 그 등에 카쿠가 한숨을 쉰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생각은 없는 듯 짐을 챙겨들고 그 뒤를 따랐다.

 

방은 다시 남겨졌다. 죽은 전보벌레와 텅 빈방. 다른 방문객이 도착할 예정은 없었다. 막 생긴 구두자국은 선명했지만 그 위로 다시 시간이 쌓여 흐려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잠겨가는 워터세븐과 함께할 것이다. 남겨진 것들은 보통 그런 법이었다.

 

-‘소리 후에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여보세요? 나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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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목재 위로 차가운 못이 박힌다. 나무는 갈색, 못은 회색. 몇 번이나 망치로 내려쳐 제대로 박힌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스버그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등허리에 맺혀있던 땀이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마찬가지로 땀투성이인 얼굴을 닦으려 했지만 손수건 또한 땀으로 흠뻑 젖어있어 별로 소용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눈으로 흘러들어간 땀이 따끔거린다. 아이스버그는 먼지투성이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찌푸려지는 눈 사이로 맑은 하늘이 들어온다. 하늘은 파란색. 구름은 흰색. 배를 건조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으니 완성까지는 넉넉히 잡아도 되겠어.’

 

그렇게 생각한 그는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를 계산해보았다. 지금 만들고 있는 건 조선섬 내에서 쓸 작은 곤돌라였다. 길게 잡아도 이틀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가 완성하고 나면 페인트를 바르는 것은 프랑키의 몫이었다.

 

기왕이면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싶지만.’

 

아이스버그는 아쉬운 손길로 뼈대가 잡힌 곤돌라를 쓸어보았다. 지난 달 고집을 부려 페인트를 칠했다가 프랑키에게 잔뜩 비웃음을 샀던 그였다.

 

누가 그렇게 촌스러운 배를 타냐!”

 

뭐가 어때서! 고동색과 빨간색으로 제대로 칠했잖아!”

 

반대라구! 고동색으로 바탕을 주고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거지. 밥팅버그!”

 

네가 칠한 건 반대야! 프랑키의 지적에 아이스버그는 제가 완성한 곤돌라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이냐는 듯 톰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재미있는지 크핫하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치고도 눈에 띄니 사고는 나지 않겠구나.’ 하고 엄지를 치켜세워준다. 부정하지 않는 모습에 아이스버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기엔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이 타고 다니는 곤돌라와 제가 만든 곤돌라가.

 

아이스버그는 선천적 색각이상자였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어떠한 이상도 없는데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톰이 알려주고 나서야 아이스버그는 제가 보는 세상의 이름이 잿빛이라는 것을 알았다. 피워진 모닥불이 얼마나 따듯한 색을 내는지. 식탁 위의 음식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색을 띄고 있는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비통함에 찬 울음소리까지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세상에서 그는 소외된 자였다.

 

크핫하!! 걱정 말아라!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엄머, 됐어요. 그깟 색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톰의 위로에 그렇게 대답했지만 궁금증은 어쩔 수 없었다. 코코로가 말하길 제 머리빛깔을 닮았다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 색인지. 프랑키를 닮았다는 하늘은 어떤 색인지. 제가 만드는 배는 어떤 빛을 띄고 있을지. 그렇게 무채색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던 날이었다.

 

이봐 잠깐, 톰즈워커스가 어느 쪽인지 아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스버그는 잠시 대패질 하던 손을 멈추었다. 요즘 들어 종종 겪는 일이었다. 톰이 바다열차를 완성한 뒤로 그의 작업실에는 손님이 많아졌다.

 

그 뒤로 돌아가서 죽 직진해요! 가다보면 간판이 나올 테니까.”

 

좋은 일이지. 톰의 노력이 빛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아이스버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대패를 놀리기 시작한다. 어렵사리 협상을 통해 얻어온 목재였다. 오늘내로 손질을 마치고 톰에게 넘겨야했다.

 

하여간, 이놈의 섬사람들은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법이 없군.”

 

등 뒤의 손님이 투덜거린다. 그러나 이미 몇 번 겪어가며 온 덕인지 더는 말을 걸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으악! 아야! 누가 이런데다 못을 버리는 거야! 운이 없는 손님인지 가는 길에 폐선섬 쓰레기란 쓰레기에는 모두 걸려 넘어지는 듯하다.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리던 아이스버그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톰 오늘 외출한다고 했는데...’

 

뒤늦게 가봐야 아무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뒤를 돌았을 때였다.

 

....”

 

아이스버그는 입을 가렸다. 마치 잉크가 번진 것처럼 손님이 머물던 자리에 흐릿하게 색이 번져있었다. 딛었던 발자국. 서있던 자리. 걸려 넘어진 자국까지 등 뒤엔 처음 보는 빛깔이 가득하다. . 색깔들. 대패를 놓친 것도 모르고 구경만 하고 있던 아이스버그는 한발 늦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 어디로 갔지?!”

 

그 사람을 확인해야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을 가진 사람을. 그렇게 무작정 색이 번진 길을 따라 달리던 아이스버그는 잠시 발을 멈췄다. 톰즈워커스의 장소를 물었으니 작업실로 갔겠지. 그리고 그는 작업실까지 가는 수십 개의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제발, 제발 아직 있어라!’

 

돌아갔으면 어쩌지. 그는 넋을 놓고 바라보느라 지체한 시간을 후회했다. 아이스버그는 이를 악 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배들을 뛰어넘느라 손바닥에 가시가 박혀도 아픈 줄도 몰랐다.

 

..! 혹시 방금!!!”

 

어 왔니? 차 마실래?”

 

그렇게 도착한 작업실은 낯설기 그지없다. 녹슨 금색의 문고리. 초록색 칠판.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 작업실을 가득 채운 흐릿한 색들이 손님이 이곳에 다녀갔음을 뜻했다. 그러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쥔 코코로뿐인 빈 작업실에 아이스버그는 혀를 찼다.

 

방금 누가 오지 않았어요?!”

 

, 정부에서 사람이 왔다며 톰씨를 찾아 나갔는데?”

 

젠장!”

 

아이스버그?!”

 

뒤에서 당황한 듯 코코로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다시 발을 놀렸다. 아직 섬을 벗어나지는 않았겠지. 희망을 가지고 달리는 도시 곳곳에 색이 번져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흔적을 쫒아 달리던 아이스버그의 발이 멈춘 것은 돌아오는 길인 듯한 톰을 마주했을 때였다.

 

, ,허억, 혹시, , 손님....”

 

, 방금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다. 엇갈릴까봐 알려주러 온 게냐? 크하핫!”

 

갔구나. 가버렸구나. 힘이 풀려버린 다리에 그는 금빛 벽돌이 깔린 길 위로 주저앉았다. 한시도 쉬지않고 뛰어다닌 무리가 이제야 몰아서 오는 것인지 아이스버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좀처럼 세우지 못했다. 무엇하러 그렇게 달려왔냐며 사람 좋게 웃은 톰이 그를 가볍게 어깨에 짊어진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아이스버그는 두 눈을 가렸다. 손님을 만나고 온 톰은 색으로 가득했다.

 

, 나 오늘 그 사람을 만났어요.’

 

아이스버그는 그 말을 울음과 같이 삼켰다. 다시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확실해진 다음에 소개해도 늦지 않는다. 다시 만나서, 다시 만나면. 도로 흐릿하게 색을 잃어가는 세상에서 그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아이스버그가 그 손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건 사흘 뒤였다.

 

사법선이 공격받았다!!!”

 

습격이다!!!”

 

프랑키가 만든 배들이 사법선을 습격한 죄로 꿇어앉혀진 광장의 한가운데. 만신창이가 되어 앉아있기도 힘든 몸으로 버티던 아이스버그의 귀에 목소리가 닿았다.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저희 CP5가 범인들을 체포 완료했습니다!”

 

움찔 몸을 떤 아이스버그가 반박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새카만 코트를 입고 내려다보는 남자와 마주한 순간은 그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마치 기적 같았다. 방금 전까지 제가 보던 세상은 거짓이라는 듯 남자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색이 번져나간다. 말로만 듣던 오만가지 색으로 가득한 세상.

 

그러나 남자가 가장 처음 보여준 색은 붉은 색이었다.

 

뭐하고 있어! 얼른 체포해!!!!”

 

...!!!”

 

세상이 온통 새빨갛게 번졌다. 몇 번이고 쏘아진 총탄이 톰의 몸을 뚫고 지나간다. 이미 흘린 피도 많은 그는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졌다.

 

으아아아아! 톰을 내놔!!”

 

그 뒤를 이은 프랑키까지. 처음 보는 강렬한 색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연이어 쓰러지는 가족들. 멍한 정신으로 아이스버그는 코코로가 자신을 끌어안고 울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코코로 할멈, 세상이 붉어.”

 

아이스버그는 두 눈을 뽑아버릴 듯 움켜쥐었다. 온통 붉어서. 아무래도 이번엔 붉은색만 가득한 세상에 떨어진 것 같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초이자 최후의 일생일대가 그대였습니다.

자나 깨나 예전에도 앞으로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라스트 버진- RADWIM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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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내뱉은 루치마저도 왜 지금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는지는 정확히 알지못했다. 백설공주의 목에 걸린 사과조각처럼 내내 목구멍 안쪽에 걸려있던 말. 그가 웃을 때도 찌푸렸을 때도 하물며 제 아래서 허덕이는 얼굴을 보고있던 순간까지도 루치는 그 생각을 입안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끝내 삼켜내지 못했던 말이 숨을 몰아쉬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이다.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치흔을 남기던 등이 잠시 움칠했을 뿐이다. 그 얼굴이 보고싶다고 루치는 생각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 고개를 돌리게 할 생각은 들지 않아서 기다리는 그를 밀치고 파울리가 움직인다.

"그러냐."

생각보다 담담한 음성이었다. 비켜봐 새꺄. 평소와 별 다를 것 없이 무겁다며 그가 구박을 건넨다. 루치는 요구대로 몸을 일으켰다. 빠져나가는 감각이 소름끼친지 파울리가 몸을 떤다. 옅게 돋은 소름을 핥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루치는 벗은 몸 위로 이불을 던져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울리는 머리맡을 더듬었다.

"내 옷."

그가 찾던 자켓은 현관 근처에 떨어져있었다. 벅벅 제 뒷통수를 긁은 파울리가 귀찮다는 듯 이불을 둘둘 두른채 걸음을 옮긴다. 가는 길에 징검다리마냥 줄줄이 떨어져있는 흥분의 흔적들은 발로 대충 밀어 한데 쌓아올렸다. 내것 네것 할것 없이 쌓인 옷가지가 산을 이뤘다.

"피울거냐?"

"아니."

파울리의 권유에 루치가 고개를 젓는다. 그에게 필요한 건 담배가 아닌 파울리의 의중이었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던 루치였으나 지금 이 순간 담배를 빼어무는 파울리의 생각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조그맣게 욕지거리를 내뱉기 전까지는.

"씨발."

상처받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떨리는 손. 루치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불을 붙이는 그 손가락을 아득아득 씹어 삼키고 잘게 경련하는 등 위에 이를 박고 싶었다. 루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기 위하여 입을 가렸다.

그래 이런게 사랑일리 없었다. 그는 파울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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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새벽. 동이트기까지는 너무 오래 남은 시각이다. 하나같이 불이 꺼진 집들은 그가 비명을 지른다고 해도 내다볼 사람하나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등 뒤를 바짝 쫓는 기척, 때문에 남자는 달리는 발을 멈추지 못했다. 입안에서 단내가 난다.

 

씨발.”

 

남자는 욕을 읊조렸다. 그는 원래 쫓기는 입장이 아니었다. 쫓기는 자가 아닌 쫓는 자. 사냥당하는 자가 아닌 사냥하는 자. 남자는 포식자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고 그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형질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그는 쫓기고 있었고 몰리고 있었다.

 

그것도 같은 포식자에게.

 

남자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포식자가 왜 포식자를 사냥한단 말인가. 가끔 아주 드물게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힘의 우위를 정하기 위한 마운팅 같은 행위였다.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상황과 다르다.

 

마치 토끼몰이처럼....’

 

선뜩 뒷목의 솜털이 선다. 목 뒤를 움켜쥐는 듯한 감각. 남자는 본능적으로 골목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칭찬하듯 기척이 조금 멀어진다. 그는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누군가 그를 유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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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리는 쓰레기 집하장에 서있었다. 청소부들이나 입을 법한 새파란 점프 수트를 입은 모습은 한 치의 위화감도 들지 않아 천직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 점이 파울리는 불만이었다. 감쪽같은데? 동료하나가 킬킬 웃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둘러본 파울리는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감시카메라를 보며 중지를 세웠다. 치직-작은 이명과 함께 무전이 날아들었다.

 

-눈에 띄는 짓 좀 하지 마.

 

네에, .”

 

화면을 보고 있었던 건 동료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얌전히 중지를 접은 파울리는 화풀이로 쓰레기봉투를 걷어찼다. 바스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파울리.

 

제 상사의 호명에 어깨를 으쓱한 파울리가 두 손을 들어 올려 알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1분 전입니다. 기계음 같은 카운트에 품안을 뒤진 파울리가 종이더미를 꺼내들었다. 눈앞에 있는 건물의 도면이었다.

 

-도면은 제대로 외웠지?

 

눈감고도 찾아갈걸요.”

 

오버하기는. 내용은 핀잔이었지만 마음이 놓였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이었다. 라이터를 꺼내 몇 번 찰칵이자 다행히도 단번에 불이 붙는다. 그 김에 파울리는 담배도 한 대 피워 물었다.

 

-정말 혼자로 괜찮겠어?

 

, 그래봤자 증원은 없을 거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면서 뭘.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사과가 떨어진다. 미안하다. 대신 이번일 끝나면 휴가 보내줄게. 그 말에 파울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짜요? 진짜? 며칠? 얼마나?”

 

-엄머, 라스베가스까진 못 가게 할 거야.

 

그럼.. 하고 말끝을 흐리는 파울리에게 상사가 못을 박았다. LA도 카지노도 안돼. 파울리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30. 다시 카운트가 울린다. 담배를 건물 외벽에 비벼 끈 파울리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은박지를 벗겨낸 껌을 입에 넣었다. 15. 몇 번 씹지 않아 딱딱하던 껌이 금방 말랑해진다. 짜악-, 경쾌한 소리가 났다. 5. 그는 작업복과 같은 색의 캡 모자를 집어들었다.

 

-4.3.2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문 안 쪽 복도가 정전이 지나가듯 잠깐 반짝였다.

 

“1.0. 진입합니다.”

 

모자를 눌러쓰며 파울리는 그 안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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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학과 동시에 완공되었다는 예관은 그 자금출처만큼이나 눈에 띄는 외관을 자랑하기로 유명했다. 시야 한구석에만 스쳐도 기어코 다시 돌아보게 만들 정도의 형편없는 디자인. 파울리가 보기에 그 건물은 마치 유치원생이 그린 건물로 만든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엿 같은 디자인을 좋아하거나.

 

혹은 남 엿 먹이는 걸 좋아할 지도 모르지.’

 

그 녀석들 집안이 후원하는 디자이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지 모른다. 파울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만큼 괴짜 같은 녀석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미 지어진 건물이고, 공짜로 다니는 주제인 그가 건물을 가릴 처지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군말 없이 다닐 정도의 완성된 인격은 아니었던 파울리는 1학년 초반엔 등교할 때마다 작은 욕지거리와 함께 누가 볼까 얼굴을 가리곤 했다. 사나이가 이딴 쪽팔린 건물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는.

 

엄머, 또 집에 안갔냐.’

 

학교가 제 2의 집이라잖아요.’

 

수위한테만 걸리지 마라. 귀찮으니까.’

 

이제 예관을 집삼아 살아가고 있다. 1년 내내 따순 물이 나오는 시설은 둘째치고, 생김새만큼이나 구조도 괴팍하기 그지없는 건물은 한 달의 대다수를 쫓기는 그에게 유용한 은신처를 제공해주곤 했으니 천국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왕이면 식당도 괜찮았으면 진짜 천국이었을 텐데..”

 

, 파울리는 입맛을 다셨다. 예관의 학생식당 가격은 기본 만원에서 만오천원 정도의 고가를 자랑했다. 만원치곤 지나치게 호화스런 음식이 제공되었기에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했지만-그게 누구의 취향에 맞춘 것인지 파울리는 굳이 묻지 않았다.- 중요한 건 파울리는 만원을 한 끼에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런고로 그는 주로 편의점 신세를 지곤 했다. 컵라면이나, 삼각김밥 같은 것들..

 

, 컵라면 하나만 먹고 싶다.”

 

생각하다보니 절로 배가 고파진다. 파울리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머릿속으론 사X, X, X껑 같은 것들이 스치고 있었다. 그 따듯한 컵라면을 들고 언 손을 데울 수 있다면. 황홀한 상상에 절로 침이 넘어간다. 그러나.

 

에쵸!”

 

현실의 그는 조그만 라이터 불에 언 손을 녹이는 중이었다. 현재 위치, 3층 복도, 창문 아래의 몸 하나 겨우 누일 넓이의 난간 안쪽. 오늘도 파울리는 도망자 신세였다.

 

시작은 별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학교 앞 호프집에서 근근이 일하며 받은 주급-사정을 아는 사장은 절대로 월급으로 주지 않았다.-은 단 이틀 만에 모조리 탕진한 파울리는 다음 급여를 손꼽아 기다리며 자판기 아래를 뒤지는 중이었다. 하도 훑어 먼지도 별로 쌓이지 않은 바닥엔 다행히 선객이 있다. 파울리는 준비한 마포자루를 좁은 틈새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 번에 힘주어 훑어내자 우수수 딸려 나오는 동전들.

 

오예!”

 

그 사이에서 빛나는 500원을 발견한 파울리는 환호를 질렀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모양이었다. 100원이 두 개, 50원이 하나, 500원이 하나. 도합 750. 자판기에서 가장 비싼 비타민 음료를 빼곤 모두 사먹을 수 있는 돈이다. 뭘 마실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그 앞에 또각 하이힐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한가해 보이네?”

 

보기 만해도 비싸 보이는 하이힐의 주인을 파울리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칼리파.”

 

그 괴짜 패밀리의 홍일점. 음대 여신. 울상과 인상의 그 중간 어딘가의 표정을 한 파울리는 내키지 않는 다는 듯 천천히 일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도도하게 선 칼리파가 안경을 올려 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가해?”

 

당연히 한가하겠지만 예의상 묻고 있는 거야. 하는 티가 풀풀 나다 못해 넘치는 억양이었다. 한가하겠지? 그렇다고 해. 하는 강요까지 느껴지는 눈빛에 파울리는 슬쩍 발을 뒤로 뺐다.

 

이 녀석들과 얽혀서 좋은 일이 없었단 말이지.’

 

지난주, 그는 카쿠와 술내기를 했다가 이사장실 안에서 팬티바람으로 발견 되었다. 그 전달엔 재브라가 잠깐 시간을 내달라기에 따라갔다가 데스메탈 사상에 동조하는 친구라고 소개되어 뺨을 맞았다. 그 전전엔 또 뭐더라. 어쨌거나 그러니 저 빌어먹을 CP9악단 녀석들과 얽혀서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은 없는 것이다. 이미 단단히 얽혀버리긴 했어도.

 

그러니까 더는 사양이다!’

 

그런 결심을 한 파울리는 멍청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한가할 리가 있나! 나도 졸업반이란 말이지!”

 

정말? 오늘 일정이 뭔데?”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말과 함께 칼리파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팔락팔락 넘겨가며 오늘 강의도 없고, 아르바이트까지는 멀었군. 하며 남의 일정을 줄줄 꿰고 있으니 등을 타고 흐르는 건 식은땀이다.

 

대체 남의 일정은 왜 꿰고 있는 거야!”

 

그야, 네 일정을 파악하면 루치가 뭐하는지 알기 쉬우니까.”

 

그걸 왜 나랑, 아니다. 됐다.”

 

아아, 학과장님 저는 왜 저런 놈들과 얽히게 되었을까요. 얼굴을 가린 파울리가 소리 없이 좌절한다. 스포트라이트도 비춰줄까? 칼리파가 장단에 맞춰주겠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들었기에 파울리는 잽싸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저 여자는 정말로 2층 홀 자판기 앞에 조명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가해?”

 

바쁘다니까. 아이스버그씨한테 가야해. , 그럼 나는 이만.”

 

죄송합니다. 아이스버그씨. 그렇게 남의 이름을 팔아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앞으로 2층 자판기 앞은 절대 지나다니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파울리의 등 뒤로 칼리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쉽네, 사례는 톡톡히 하려고 했는데.”

 

“....?”

 

사례. 사례금. . 단 두글자에 힘차게 내딛던 파울리의 걸음이 멈춘다. 마치 기계마냥 파울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안젤리카, 조율할 때 되지 않았어? 저번에 보니까 C현 하나가 소리 이상하던데.”

 

“...? 우리 안젤리카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며 칼리파가 고개를 기울인다. 덕분에 결 좋은 금발이 우수수 쏟아지는 모습은 다른 학생들이 보기에 심장을 부여잡을 정도였지만, 파울리의 관심사는 이미 그 밖이었다.

 

우리 안젤리카가.. 안젤리카...”

 

충격을 받아 폐인처럼 중얼거리는 파울리를 보며 칼리파가 쐐기를 박았다.

 

많이 바빠?”

 

그럼 어쩔 수 없지. 안녕.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인사를 건넨 칼리파가 또각거리며 몸을 돌린다. 한발 늦게 파울리가 몸을 날렸다.

 

잠까안! 잠깐! 잠깐, 잠깐!”

 

다급하게 팔을 뻗어 칼리파를 막아선 파울리가 비굴하게 손을 비빈다.

 

사례라는 게 정확히...?”

 

, 이 정도?”

 

걸려들 줄 알았지. 파울리를 움직이게 만들 단어가 세 개 있다면 바로 돈, 아이스버그, 안젤리카였다. 그 중 두 개를 꺼내든 칼리파는 고민하는 척 손가락을 세 개 펴들었다.

 

“...삼천원?”

 

아니.”

 

삼만원?”

 

아닌데.”

 

그럼, 거기까지 말을 마친 파울리가 감격에 찬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는다. 그 크게 뜨여진 눈과 쫑긋거릴 것 같은 귀를 본 칼리파는 안경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리고 살풋 웃으며 덧붙였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세상에서 나만큼 한가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온다면 그놈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경쟁자를 해치워서까지 한가함을 증명할 준비가 된 파울리가 당당히 제 가슴을 두드린다. 그런 그에게 칼리파는 오늘의 미션을 설명했다.

 

밤에 파티가 있어. 중요한 행사인데 녀석들 모두 도망갈게 분명하거든. 레슨은 5시까지 풀이고 끝나기 전에 집에서 차가 올 테니까 그 전까지 그 녀석들이 학교에서 못 벗어나도록 이거 들고 도망치면 돼.’

 

그러면서 건네준 건 지갑 서너개와 자동차 키들이었다. 걸어서 도망갈 놈들은 아니니 돈이 없으면 학교에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게 칼리파의 의견이었다. 물론 혹시 모르니 다른 약점들도 잡아놓았다는 칼리파는 데이트가 있다며 유유히 사라지고, 그 이래로 파울리는 도망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우습게 봤는데..’

 

아무리 괴짜들이라지만 도망의 천재 이 몸만 할 것이냐. 하는 태도로 학교를 활보하던 파울리의 마음을 돌려놓은 건 그의 사물함이었다. 항아리 우유를 쪽쪽 빨며 계단을 오르던 그는 복도 한 켠에서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인간 바리케이트를 뚫고 들어간 그는 강제로 뜯어진 게 분명한 제 사물함을 발견했다. 어쩐지 제가 알던 것보다 한결 정리되어 있는 사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칼리파가 말했구나!’

 

파울리는 제 허리춤을 더듬었다. 대충 만져보아도 두툼하기 그지없는 힙색엔 지갑과 키들이 들어있다. 범인들이 찾던 것들은 이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의 사물함을 뜯어?!”

 

자자, 비켜주세요. 지나갑시다.”

 

화내기 무섭게 새 캐비닛이 도착했다. 심지어 더 좋아 보인다. 분노의 방향을 잃은 파울리는 뻘쭘하게 새 캐비닛에 제 물건들을 옮겨 넣었다. 파울리가 캐비닛 앞에 있다는 제보를 듣고 카쿠가 달려오기 전까지만. 그 후로..

 

파울리 못 봤는감.”

 

도망치고.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고 했는데.”

 

한발 늦었군.”

 

또 도망치고.

 

짜바랍! 파울리 팬티는 하얀 삼각팬티다!!”

 

웃기지마! 파란 사각팬티라고!”

 

저기다! 잡아라!”

 

또 또 도망치며 버텨온 것이다. 그렇게 도달한 난간에서 파울리는 언 팔을 비볐다. 초가을이라지만 바람 부는 그늘에서 느끼는 날씨는 초겨울 못지않다. 그런 그늘 안에서 한 시간 반째 체류하던 그는 코를 풀어낸 휴지를 보며 이것들을 태워 모닥불을 피우면 안 되는 걸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파울리는 순간 토끼마냥 쫑긋 귀를 세웠다.

 

-자박.

 

라이터를 끄고 숨을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3. 파울리는 한껏 몸을 낮췄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구먼.”

 

카쿠였다. 가벼운 러닝화 소리의 주인인 그는 복도 끝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카쿠가 노인네 같은 건 말투뿐만이 아니다. 감도 노인네들처럼 귀신같아서 벌써 몇 번이나 그를 달리게 한 카쿠의 등장에 파울리는 아예 숨까지 멈췄다.

 

얼른 지나가라..’

 

언제 얼었었냐는 듯 손아귀엔 식은땀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파울리의 바람과는 달리 카쿠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웅웅-거리는 진동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느리게 걷던 카쿠의 걸음이 아예 멈춰버린다.

 

전화 받았다네. ? 거기도 없어?”

 

사람까지 써서 찾고 있는 거냐! 파울리는 어이가 없어 소리치려 했던 입을 틀어막았다. 덕분에 합.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카쿠에겐 닿지 않은 모양이다.

 

알겠구먼, 찾으면 바로 다시 전화할 테니까.”

 

골치가 아프다는 듯, 말꼬리를 늘어트린 카쿠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이 걸려 아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사라지고 난 후에야 삐죽 고개를 내밀어 텅 빈 복도를 확인한 파울리는 슬쩍 복도로 발을 디뎠다. 슬슬 다음 은신처를 찾아야겠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그래서 파울리가 향한 곳은 학장실이었다. 아이스버그씨는 사실 그제부터 출장 중이라 학장실 문은 잠겨있으니 설마 거기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하리란 계산하였다. 물론 문이 잠겨있다는 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지만.

 

“13레슨실 난간은 학장실까지 이어져있단 말씀.”

 

그리고 아이스버그씨는 창문을 잠그지 않는다! 학장실 창밖에 도달한 파울리는 역시나 손쉽게 열리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제야 따듯한 방에서 몸 좀 녹이겠네.”

 

처음부터 여기에 있으면 들킬까봐 일부러 바깥에서 시간을 지체한 파울리였다. 캐비닛도 뜯어낸 녀석들한테 열쇠 빌려오는 것쯤이야 간단하겠지. 그러니까 긴장이 풀렸을 지금 여기에 숨는다! 파울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창문을 닫았다.

 

따듯하고, 먹을 것도 있고, 커피향도 좋고...잠깐 커피향?’

 

머리를 때리는 경고에 그는 반사적으로 다시 창문으로 열어젖혔지만, 그보다는 목소리가 빨랐다.

 

멈춰.”

 

“.....젠장.”

 

빙글, 비어 있어야할 의자가 돌았다.

 

생각보다 3시간 45분 늦었군. 바로 이리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검은 가죽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있던 루치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하하하.”

 

파울리는 고민했다. 도망을 가느냐. 자진납세를 하느냐. 도망을 가느냐. 자진납세를 하느냐. 그에겐 잡혀선 안 될 절대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리 불쌍한 안젤리카. 칼리파는 안젤리카의 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그녀는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다.- 파울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젤리카를 지켜야했다. 조율을 받으려면 한동안 바짝 돈을 벌어야한다. 그러니까 도망이다!

 

그럼 안녕!”

 

파울리는 잽싸게 창문을 넘었다. 넘으려고 했다. 창문이 눈앞에서 닫히지만 않았더라면.

 

어딜.”

 

으악! 이 자식! 손이라도 찧었으면 어쩌려고! 싸우자는 거냐!”

 

용케 창문이 닫히기 전에 손을 잡아 뺀 파울리가 제 손가락을 확인한다. 하나,,,, 열 개가 모두 제대로 붙어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모습을 루치가 한심하단 얼굴로 응시했다.

 

키랑 지갑 내놔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키랑 지갑을 왜 나한테서 찾아.”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모르쇠로 일괄이다. 언제 손가락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파울리를 보며 루치가 바짝 다가섰다. 직접 찾아내겠다는 기세에 파울리가 냅다 창문에서 떨어져 도망쳤다.

 

, 나는 모르는 일이라니까!”

 

편의점에서 내 카드 긁은 거 문자 왔다.”

 

하하하, 어떤 간 큰 놈이 네 카드로 먹을 걸사냐.”

 

카드 내미는 네 모습이 CCTV에 찍혔는데 말이지?”

 

그걸 또 들켰다니 젠장. 파울리는 블랙카드에 휘둥그레져 일주일치 식량을 질렀던 자신을 원망했다. 의자를 사이에 두고 빙글빙글 돌며 변명하던 파울리가 뒤통수를 긁었다.

 

칼리파한테 수고비 받으면 갚을 테니까!”

 

제 입으로 칼리파의 사주를 받았음을 실토한 파울리가 합, 입을 다문다. 네 놈 맞잖아. 루치가 눈썹을 찌푸렸을 때였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먼.”

 

그러게.”

 

복도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파울리의 안색이 파리하게 굳는다. 루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의자를 잡아당겨 생긴 틈으로 다리를 뻗은 루치가 파울리의 정강이를 후려 찬다. 고통에 허리를 숙인 그를 책상 밑으로 우겨 넣은 것과 학장실 문이 열리고 카쿠가 들어온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여기 안 왔는가.”

 

아직도 못 찾았나보지.”

 

텅 빈 학장실을 휘 둘러본 카쿠가 실망스러운 얼굴을 한다. 그런 카쿠를 핀잔하듯 말을 건넨 루치는 한 점 거리낄 것 없는 표정이었다.

 

사람까지 푼 것치곤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은데.”

 

도망치는 데는 선수니까 말이여.”

 

교내 방송으로 엉덩이에 점이 있다고 까발렸는데 나오지 않았다. 짜바랍.”

 

내 엉덩이에 점 따윈 없어! 책상 밑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파울리를 루치가 발로 밟아 누른다. 그러나 덜컹거린 소리까지는 감추지 못해 나가려던 카쿠가 도로 뒤를 돌았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나?”

 

묻는 카쿠에게 인상을 쓴 루치가 벌레가 있어 밟았다며 뻔뻔하게 변명한다. 벌레가 된 파울리가 작게 꿈틀거렸다. 종아리를 움켜쥐는 손아귀 힘에 루치의 눈썹이 떨린다. 다행히도 카쿠는 그 반응을 루치가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듯 했다.

 

소독업체를 한번 부르는 게 좋겠구먼, 벌레가 있다니 피아노에 닿기라도 한다면 끔찍하니께.”

 

그건 그렇지.”

 

그럼, 다시 찾아보러 갈 테니 오면 바로 연락 부탁하구먼.”

 

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혀를 끌끌찬 카쿠가 이러다간 정말로 칼리파에게 끌려가게 생겼다며 발을 재게 놀린다. 그 뒤를 따라 후쿠로가 문을 닫고 마침내 발소리까지 사라졌을 때서야 루치는 허리를 숙였다.

 

어이.”

 

벌레한테 말도 시키냐.”

 

얼마를 받았다고?”

 

벌레마냥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던 파울리가 그 말에 번뜩 고개를 든다. 네가 줄 거냐. 얼마나 줄거냐. 조금 더 줄지 모르니 더 높게 불러볼까 고민하는 머리통을 보며 루치가 칼리파에게 물어 보겠다며 못을 박는다. 하는 수 없이 파울리는 제가 받기로 한 돈을 이실직고 했다.

 

“30.”

 

그보다 더 주지.”

 

“...진짜냐!”

 

단번에 화색이 돈 파울리가 고개를 들어 올려 루치를 올려다보았다. 기대감 때문인지 상기된 얼굴. 그런 그에게 찾아든 건 루치의 손가락이었다. 허리를 숙인 루치가 엄지로 파울리의 입술을 쓸어내린다. 어 이게 아닌데. 하고 그가 입을 벌린 순간엔 입술이 찾아들었다.

 

어울리지 않게 뜨거운 혀가 입안을 더듬었다. 느리거나 혹은 빠르거나. 제멋대로 박자를 바꾸어가며 변덕스럽게 구는 것도 그랬다. 울리가 아는 로브 루치는 가장 낮은 음으로 악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연주를 하는 놈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울리는 그 키스 방식이 꽤 그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원래 제멋대로인 놈이지.’

 

입술을 겹친 채 조금 웃자, 그 사이 단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은 루치가 불만스런 기색을 표한다. 웃음조차 집어삼키겠다는 듯 혀를 옭아맨다. 겨우 맞추던 장단마저 놓친 파울리가 휩쓸려가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심장이 뛰는 것인지, 숨이 막혀 그러는 것인지 모르게 될 무렵,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는 것을 끝으로 떨어져나간 루치가 허리를 세웠다. 입안에서 열기가 옮아간 것인지 그 입술까지 붉다. 잠시의 침묵 후 파울리가 입을 열었다.

 

설마, 이게 30만원이라는 건 아니겠지?”

 

루치가 움칠 몸을 떨었다.

 

내 키스를 고작 30만원짜리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불만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는 얼굴이 정곡을 찔려 쪽팔린 모양새라는 걸 알아챈 파울리가 파안대소하다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루치의 한심스럽다는 시선이 머리위로 떨어졌지만 파울리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술이라도 마시러 갈까. 칼리파가 뭐라고 하면 어쩌지.”

 

상관없어. 본인이 가지고 갈 수도 있는 걸 네 녀석한테 맡겼다는 건 나보고 나머지를 책임지고 파티로 보내라는 거겠지.”

 

, 맞다 안젤리카. 네가 듣기에도 음이 안 맞는 거 같냐.”

 

글쎄.”

 

제대로 기억해봐라 좀.”

 

루치의 전화엔 차곡차곡 악의에 찬 부재중이 쌓인다. 어깨동무를 한 둘은 호프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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