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밤이라도 괜찮아, 새벽이 올 때까지 네 손을 잡고 걸을게
[로브 루치 X 파울리 / 길잡이.]
W.잭모리스
루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길을. 어디를 어떻게 흘러들어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가로등하나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밤길을 걷는 중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두운 골목길. 그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어렴풋하게 실루엣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벽과 벽. 사이로 빠지는 길은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외길인 듯 했다. 그래서 대체.
“대체 여기가 어디냐?”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치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아는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우악! 여전히 품위 없는 목소리를 낸 상대의 목줄기가 손아귀에 잡힌다. 그 목을 조르기 직전 그는 간신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뭐야, 네 녀석이었나.”
“너 이 자식, 사과부터 해! 사과를!”
“갑자기 나타난 쪽이 잘못이다.”
뻔뻔하게 답한 루치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턴다. 그에 상대가 한층 더 열받아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그는 상관치 않았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냐. 파울리.”
“무슨 소리야. 쭉 같이 있었잖아.”
그랬었나? 루치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아, 그래. 그는 일이 끝나고 술을 한잔 하러가기로 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브루노의 술집에 가는 길이었겠지. 벌써부터 치매냐며 폭소를 터트리는 파울리의 얼굴을 밀어 입을 다물게 한 루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래서, 여긴 어디지?”
“그거야 네놈이 알겠지.”
우악스럽게 짓눌린 코가 삐뚤어진 것 같다며 파울리가 툴툴거리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길을 잃은 건 넌데 왜 나한테 물어?”
옆에서 벅벅 뒷머리를 긁는 소리가 들려와 그는 손쉽게 파울리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분명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품위 없이 머리를 긁고 있겠지. 그런 루치에게 다시 질문이 돌아온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건 너다. 아는 길이면 잃어버렸겠ㄴ...”
잘 생각해봐. 말을 끊고 파울리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조금 묘한 음성이다. 평소라면 지금쯤 발끈하면서 달려들었을 녀석이 차분하게 다시 물어오는 음성에 루치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는....”
3번 부두 뒷골목이군. 주변을 살펴보던 루치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 길게 이어진 어두운 외길. 단지 어두워서 알아보지 못했을 뿐 헤맬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대로 죽 걸어 골목에서 꺾으면 브루노의 술집이 나온다. 3번 부두? 한번 되물은 파울리가 이내 그의 의견에 긍정했다.
“그래, 3번 부두네. 네 말대로.”
“가자.”
루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위치도 방향도 확실하니 겨우 어둡다는 이유로 망설일 일은 사라진다. 뚜벅뚜벅. 걷는 그의 곁에 자박거리는 가벼운 운동화소리가 함께했다.
걷는 길은 묘하게 적막했다. 발걸음 소리 외엔 이렇다 할 생활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조용한 길이었던가, 고민해본 루치는 이유를 알아챘다. 조용한 건 주변이 아니라 파울리였다. 좁은 길이기에 오른쪽 뒤에서 한발자국 떨어져오는 파울리는 평소답지 않게 조용하다. 귀 기울여 발자국 소리를 들어야만 뒤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정도였다.
“파울리.”
그래서 루치는 드물게 제가 먼저 파울리를 호명했다.
“응?”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루치는 자신의 단어선택에 모멸감을 느꼈다. 뭐가 다행이지.
“아니다.”
싱겁기는. 루치의 부정에 파울리가 심드렁히 이야기한다.
둘은 다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파울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보다 반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다. 무거운 굽소리를 내는 워커에 비해 파울리의 운동화는 가볍고 소리가 옅다. 그래서 루치는 그가 아직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했다. 그는 이 이유 없는 불안감이 불쾌했다.
“파울리.”
“왜?”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두 번째 파울리를 호명하고 만다. 즉각 들려오는 대답에 부정한 루치는 도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번엔 파울리가 가만히 넘어가주지 않았다.
“뭐야, 너 무섭냐? 설마 무서운 거냐? 무서운 거구만!”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등짝을 내려친 파울리가 제멋대로 파안대소 한다. 인상을 찌푸린 루치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채 열 걸음도 가기 전, 뒤에서 뻗어온 파울리의 손이 제멋대로 남의 손을 잡아 깍지를 잡아 낀다.
“자, 손이라도 잡아줄까?”
떨어져라. 루치는 파울리를 떼어내려 노력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억지로 떼어낸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일반적인 조선공으로서의 최대치였다. 더 이상 힘을 썼다간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한숨 쉰 루치는 결국 파울리와 손을 잡은 채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서 술잔을 쥐는 것이 손을 떼어내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꽤 걸은 것 같은데도 브루노의 술집으로 갈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루치가 그렇게 물으려 했을 때였다.
“오, 저기 봐. 도착했나.”
파울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루치는 이 끝없던 골목 끝에서 밝게 켜진 가로등을 보았다. 그리고 가로등이 비추는 그 갈림길, 그 끝에선 익숙한 브루노의 술집이 보인다.
‘어두워서 거리감각을 잃어버렸었나보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술을 한잔하고 쉴 수 있겠다 한숨처럼 말하는 루치에게 그러게, 하는 대답이 들려온다. 조금 더 신이 날 줄 알았는데, 헤매다 도착한 만큼 호들갑을 떨며 달려 나갈 줄로만 알았던 파울리의 대답은 의외로 덤덤했다.
“설마 고작 그만큼 걸었다고 벌써 지친 건 아니겠지.”
“하하하, 그럴 리가 있냐.”
가서 시원하게 맥주나 마시자구. 그렇게 말하며 깍지낀 팔을 힘차게 휘두르는 파울리는 아직도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아래에 도착한다면 표정을 확인 해봐야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치는 대수롭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갈림길에 도착한다.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는 갈림길부터 그 너머의 술집까지는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럼. 갑작스러운 빛에 눈살을 찌푸린 루치가 파울리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다 왔네.”
그렇게 말한 파울리가 여태 제멋대로 끼고 있던 손깍지를 푸르고 물러난다.
“뭐냐.”
“뭐, 네 녀석은 앞으로도 잘할 거야. 여태도 그래왔잖냐.”
다른 사람들이랑도 좀 어울리고, 폭력적으로 좀 굴지 말고.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파울리가 어울리지 않게 잔소리를 쏟아냈다. 무슨. 어이없어하는 루치에게 파울리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팡팡 등을 두드린다.
“헛소리 말고 얼른 마시러 가지. 이런 식으로 굴면 앞으론..”
은근히 힘이 실린 손길에 절로 허리가 숙여진 루치가 짜증을 내며 숙인 허리를 폈을 때, 파울리가 등을 밀었다. 안녕. 그런 인사가 들린 것도 같다고 루치는 생각했다.
‘안 어울리는 청승이군.’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돌아본 뒤에 파울리는 없었다.
“이봐! 이쪽이야 이쪽!”
“여기도 부상자다!!”
시야는 여전히 암흑이었다. 훅 들이쉰 숨엔 매캐한 연기가 포함되어있어 반사적으로 코를 막으려 팔을 들어 올린 루치는 품안에 묵직한 무언가가 안겨있음을 알아챘다.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것. 그것이 사람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루치! 괜찮은감?!”
이내 우수수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함께 나타난 건 카쿠였다. 눈부신 시야에 눈살을 찌푸린 루치는 목소리로 카쿠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빛에 적응한 눈이 주변 사물들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래.”
빛이 들어오는 건 카쿠가 천장을 덮고있던 파편을 치워냈기 때문이었다. 벽이 무너진 건지 휘어지고 끊어진 철근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파편들. 그는 그런 파편들의 용케 피해간 작은 공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파울리는 괜찮은가?”
카쿠의 질문에 루치는 처음으로 고개를 위가 아닌 아래로 향했다. 사고가 났을 때 겹쳐 쓰러진 듯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파울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냄새가 난다. 루치는 냄새를 맡은 후에 파울리의 가슴을 뚫고 나온 철근을 보았다.
휘어진 철근은 등에서부터 가슴을 완전히 관통한 채, 그의 가슴에 아슬아슬하게 닿아있었다. 그보다 먼저 꿰뚫린 장애물이 있었기에 남은 부분이 닿지 않은 듯하다. 루치는 손을 들어올렸다. 빈손아귀에선 깍지를 끼고 있던 굳은살이 박힌 단단한 손의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네 녀석은 앞으로도 잘할 거야. 여태도 그래왔잖냐.’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을 봤어야만했다고, 회색 먼지가 쌓인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루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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