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인가 너는 내게 꽃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Camille Deshamps X Ricardo Bareta / 하나하나 AU]
W.잭모리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점, 히카르도 바레타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2층의 창가가 보이는 벤치는 지난해 그늘을 만들어주던 벚나무가 쓰러져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는 곳이다. 그 벤치에서 히카르도는 잠시 선잠이 든 듯 쏟아지는 햇볕 아래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나가던 마틴에게 매우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봄이라면 따듯한 햇살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한여름. 내리쬐는 더위에 그 완고한 홀든가의 장남도 와이셔츠의 단추를 푸르는 날씨다. 이런 날씨에 왜 저기서? 그러나 그는 현재 심부름을 가는 중이었고 대하기 힘든 히카르도에게 참견하는 것보다는 브루스가 맡긴 일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마틴 챌피는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도 그 자리에 그가 남아있다면 말을 걸어보기로 다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골목을 돌자 맞은편의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그를 유혹했기 때문에 그 다짐은 금방 돌아가는 길엔 빵을 사가야겠다. 로 바뀌었으므로 결국 마틴 챌피가 히카르도를 다시 떠올린 건 그를 다시 발견했을 때였다. 심부름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서 마주친 이글과 차를 한잔 마시고, 베이커리에 서 종이봉투 가득 빵을 사들고서 돌아오는 길.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벤치에 남아있는 히카르도를 봤을 때 마틴은 그 옆에 엉덩이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바레타씨? 안녕하세요.”
마틴은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고 히카르도는 그 인사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히카르도에게 마틴이 빵을 큼지막하게 뜯어 내밀자 고개를 젓는다. 마틴은 거절당한 빵에 버터를 펴 발라 입에 물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질문의 대답은 느리게 나왔다.
“까미유와 식사 약속이 있다.”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다. 담담한 히카르도의 말에 마틴의 시선이 시계로 향한다. 현재 4시 20분. 아까 심부름을 가며 히카르도를 발견했던 것이 오전 11시정도. 대체 어느 식사 약속이지. 점심 약속이 깨진건가.
“처음부터 저녁 식사 약속이다.”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나온 대답에 마틴은 반사적으로 히카르도의 생각을 읽을 뻔했다. 궁금함이 얼굴로 드러났던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세 그만두었지만 이미 설레이고 들뜨는 마음이 흘러들어온 이후다. 이 커퀴벌레들. 못마땅하게 입술을 내민 마틴은 새 빵을 꺼내 입에 물었다. 뒤늦게 히카르도의 손아귀에 쥐여진 작은 꽃다발을 눈치 챈 건 그 다음 빵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그건...?”
사실 굳이 묻지 않아도 대답을 알 수 있는 질문이었다. 직접 꺾은 듯, 가지 채 꺾인 대여섯 송이가 엉성하게 리본으로 묶인 꽃다발은 작고 초라했지만 예뻤다. 흰 꽃잎의 끝에 물든 형광색이 대놓고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까미유에게.”
추측했던 그대로를 입 밖으로 뱉어낸 히카르도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마틴이 데샹씨가 좋아하시겠네요. 하고 말했을 때 그랬으면 좋겠는데 하고 대답한 히카르도의 시선은 2층 창가를 향해 있었다. 이윽고 마틴의 종이봉투가 텅텅 비었을 때 쯤 히카르도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때까지 아쉬운 듯 빈 봉투를 바라보고 있던 마틴은 그럼, 하고 인사하고 사라지는 히카르도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던 것 같은데.’
뭐 알아서 치료해주겠지. 환자는 의사에게. 마틴은 근처 쓰레기통에 빈 종이봉투를 버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기 전에 아까 그 빵집에 다시 들릴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다 함께 나눠먹어야지. 마틴은 무의미하게 다짐했다.
까미유 데샹을 만나는 것은 히카르도 바레타에게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다.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거울로 제 차림새를 점검한 히카르도는 눈앞의 고급스러운 나무문을 보며 크게 심호흡 후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언제나 노크는 두 번.
“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히카르도는 문고리를 돌렸다.
“까미유.”
퇴근은 생각도 하지 않는 건지 여전히 흰가운을 입은 까미유 데샹이 책상에 앉아 있다. 성큼성큼 그러나 조급하지 않게 책상으로 다가간 히카르도는 제 호명에 고개를 드는 까미유에게 옷걸이에 걸린 그의 겉옷을 건넸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리키?”
“약속을 잡은 건 네가 아닌가.”
맞다. 그랬지. 뒤늦게 기억났다는 듯 까미유가 달력을 살피며 사과를 건넸지만 히카르도는 딱히 화내지 않았다.
까미유가 약속을 잊은 것도. 사실은 점심 약속이었다는 것도. 그가 히카르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그는 오후 내내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시선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히카르도는 까미유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대신 손에 들고 온 것을 건넸다.
“식사에 초대해 준 답례로.”
“고마워, 리키.”
오전부터 그의 손아귀에 쥐여있던 꽃다발은 다행히 시들지는 않았다. 그 다발을 받아든 까미유는 눈꼬리를 휘며 그의 뺨에 감사인사를 건넸고 꽃다발은 작은 물 컵에 꽂아 탁자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더는 바라보지 않았다.
“미안한데, 처리할 서류가 남아있어서.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그래. 대답한 히카르도가 진료실 구석 쇼파에 자리 잡는다. 느리게 들리는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 그는 인내심 있게 까미유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둘이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미안, 리키. 달콤한 사과에 히카르도가 괜찮다는 말을 되돌린다. 내일이라도 점심 같이 먹을래? 하는 유혹에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사랑해. 리키.”
“사랑한다. 까미유.”
히카르도 바레타는 약속을 위해 매일 같이 까미유 데샹의 진료실을 찾는다.
마틴 챌피가 히카르도 바레타와 마주쳤던 그 거리를 다시 찾게 된 것은 거의 두 달 만의 일이다.
그는 제게 심부름을 맡기고 튄 동양에서 온 어린 동료를 씹으며 까미유 데샹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왔으니 저번에 갔던 그 빵집을 다시 찾아갈 생각에 들뜨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다. 얼른 끝내고 간식이나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는 히카르도가 앉아있던 벤치에서 이번엔 까미유를 발견했다.
저번과 다른 부분이라면 어느새 새로 심은 건지 조경수가 크게 자라 벤치를 가리고도 남을 정도의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서 눈을 감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즐기는 까미유는 편안해보여서 마틴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발길을 돌려 가져온 서류를 그의 책상 위에 두기 위해 진료실로 향한다. 그렇게 계단을 올라 아무도 없을 진료실 문을 열었을 때 마틴 챌피는 그의 책상을 가득 채운 꽃들을 보았다.
반딧불 빛깔의 작은 꽃송이들.
마틴은 이 꽃을 알고 있었다. 가지 채 꺾어 만들어진 꽃다발과 어설프게 묶인 리본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그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문득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벤치는 크게 자란 조경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그늘엔 까미유 데샹이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조경수가 피워낸 아름다운 반디불 빛깔의 꽃 아래서.
툭하고 무언가 힘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까미유 데샹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류를 넘기던 일을 그만 두었다. 책상이 보이는 맞은편 쇼파에는 그가 아주 잘 아는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소리를 낸 주범인 듯 힘없이 떨어진 팔이 바닥을 쓸고 다른 팔로는 진료실의 불빛이 거슬리는지 눈 위를 덮은 채였다.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슴은 그가 깊게 잠들었음을 알린다. 까미유는 가만히 턱을 괴고서 그 모습을 관찰했다.
얼마 전부터 히카르도는 부쩍 피로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까미유는 그 명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파리한 안색. 낮은 목소리. 여기저기 감긴 피 묻은 붕대. 그리고 매일 같이 가져다주는 초라한 꽃다발. 그는 손을 뻗어 책상 한 켠을 장식한 꽃다발을 빼들었다. 세간에 듣기를 기묘한 병이 돌고 있다고 했다. 별 볼일 없는 감정 따위가 씨앗이 되는 그 병은 제 사랑을 몸으로 피워낸다고, 참 보잘 것 없는 시위라고 까미유 데샹은 생각했더랬다.
겨우 저를 봐달라고 꽃을 피우는 것이 고작이라니.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까미유는 손안의 꽃을 손가락사이로 빙글 돌려보았다. 작은 꽃은 해가 지고 나서 진가를 발휘한다. 반딧불처럼 환히 빛나는 작은 꽃. 그는 의자를 끌며 일어나 쇼파로 향했다.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다가가도 눈뜨지 못하는 피로한 남자가 거기에 있다. 까미유는 뒤척이는 히카르도를 위해 진료실의 등을 끄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네가 불멸자라서 다행이야.”
그는 어렵지 않게 히카르도가 제 몸에서 피어난 꽃을 꺾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혈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는 것을 꺾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겠지만 상대가 불멸자이니 무엇을 걱정할까.
평생 총이나 쥐어보았을 억센 손으로 제가 피워낸 작은 꽃을 상하지 않게 꺾어 서투른 손길로 리본을 묶는 것을.
까미유 데샹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떠올린다. 그리고 만족스러울 만큼 반복하고 나서야 그는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구두굽 소리를 내며 다가가도 눈뜨지 못하는 피로한 남자가 거기에 있다. 까미유는 뒤척이는 히카르도를 위해 진료실의 등을 끄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리키, 나를 좀 더 사랑하도록 해.”
이 작은 꽃을 피우는 데는 겨우 한줌의 사랑으로 족하다니 이 얼마나 저렴한 양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