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지는 늦은 오후였다. 저녁이 되기엔 이름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개어놓은 이불은 벌써 불룩하게 솟아 올라있다.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침대보를 따라 흐르는 머리칼의 주인은 본래 지금 즈음엔 본래 펍에서 처음 보는 인간들과 진탕 술을 퍼마시고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로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치며 침대 한 켠에 몸을 내렸다. 이불에 끝에선 온몸을 구겨 넣고도 숨길 수 없이 빠져나온 머리칼이 구불거리며 흐른다. 손가락 사이를 흐르는 머리칼처럼 웃음이 함께 흘렀다.

.”

프레이야가 부러워했다는 그 금발 끝에 입을 맞추어도 그 주인은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그 원인을 알고 있는 로키는 조급해하지 않고 제 존재를 일깨우듯 몇 번이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제 형을 불렀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토르.”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나직한 목울음이 이불 너머로 전해졌다. 꾸물꾸물 동면중인 곰이 깨어나듯 몸을 일으킨 토르가 로키에게 등을 내보인다. 로키는 말없이 그 등에 기대었다.

베너의 핏줄을 만났다.”

핏줄?”

손자의 조카정도 된다더군.”

그건 그냥 남 아냐? 그렇게 하고 비꼬고 싶은 마음을 로키는 꾹 눌러 삼켰다. 고작, 고작 그 정도의 연결고리라도 찾고 싶어 닮았을, 혹은 전혀 닮지 않았을 인간의 얼굴을 몇 번이로 바라보았을 토르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그 사갈 같은 인간들이 다시 신에게 도움을 청했어? 그게 아니라면 우연을 가장하여 다음을 약속했어? 물음대신 쉿쉿거리는 바람소리가 목구멍을 빠져나간다. 로키는 의미 없이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구불거리며 말리는 머리칼만큼이나 제 속도 꼬여있음을 토르가 모르지는 않을 터다.

한참의 침묵 끝에 토르가 긴 한숨을 내뱉는다. 숨길 수 없는 외로움이 사향내처럼 묻어 퍼졌다.

인간은 참으로 빨리 죽는구나.”

옛 친구의 흔적을 이제는 추억이라 이름붙인 낡은 상자에 넣어 보내기로 하며, 토르는 몸을 돌려 묵묵히 답을 기다리던 제 동생을 끌어안았다. 그 품에서 로키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드디어.

드디어 오롯이 혼자가 된 토르가 거기에 있었다.

정답이야 형.”

우울에 짓눌린 그 얼굴을, 턱을 손끝으로 매만진 로키는 상을 주듯 갈라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감추지 못한 속내로 스민 혓바닥이 체념이 가득한 상대를 옭아맨다. 가늘어졌던 동공이 누가 볼 새라 눈커풀 아래로 몸을 숨겼다.

 

나의 형, 토르를-.”

여덟 번째였다. 일곱 번을 추방당했고 일곱 번을 돌아온 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앞에 무릎 꿇린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로키는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아스가르드에서 추방한다.”

“...로키.”

영구히.”

로키!”

형도 내가 전리품이 되길 바라?”

납득하지 못한 판결에 높아진 목소리는 그 한마디에 사그러들었다. 왕이 아닌, 왕위를 받을 후계자가 아닌. 전리품. 터부와 같은 단어에 주먹쥔 손이 힘줄을 내보인다. 하지 못하는 말 대신 핏줄 선 눈을 로키는 외면했다. 인간을 좋아했잖아. 나보다도 더. 그 좋아하던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 그리고. 그리고 꼭.

형이 외로워졌으면 좋겠어.”

이젠 상징처럼 남은 궁니르가 대전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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