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홀드먼. 그는 가장 따듯하다는 봄의 끝자락에서 태어났다.
변방을 지키는 유서깊은 백작가. 권리를 누리기 이전에 의무를 먼저 이야기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잉크와 책냄새가 섞인 품을 벌려 자식들을 안을 줄 알았고, 가만히 창가에서 책을 읽노라면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어머니는 그를 발견하면 언제나 눈가를 접으며 과자를 쥐여주는 곳. 바쁜 일상에도 틈틈히 공부방을 들러 동생들을 확인하는 여덟살 터울의 형과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고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두살 터울의 동생.
그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그는 누가 보아도 모자람 없는 가족들의 일원이었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얼굴로 눈웃음을 지으면 누구라도 그에게 작은 간식거리를 쥐여준다. 언제나 제 흥밋거리에만 눈을 돌리는 동생과는 다르게 그는 모든 분야에서 보통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뛰어난, 그러나 천재라고 하기엔 모자란. 그런 평가를 듣노라면 첫째는 언제나 안쓰러운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조금 더 잘해도 괜찮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보통 이상의 평가를 받는 동생을 보는 형의 마음이란. 혹여 후계자의 자리에 위협이 될까, 제 재능을 죽이는 것은 아닐까. 다정한 형의 마음 씀씀이에 순응하여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만큼?"
그러나 이어지는 요구를 에릭은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수치로 나타내 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는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시키는 대로 했다. 선생님들은 그가 공부를 잘해야 부모를 만족시키는 자랑스러운 자녀가 된다고 했다. 잘 하는 것은 그들이 내는 문제를 틀리지 않고 맞추는 것이다. 에릭은 그 기준을 만족시켰다. 그렇게하면 흐뭇한 얼굴의 부모는 조용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하고 싶은 걸 하렴.
후계의 자리는 이미 첫째가 공고히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부모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것.
"나는 커서 상인이 될거야."
아버지를 따라 산행을 다녀온 여동생은 언제나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영지를 둘러싼 깊고 험한 산의 꼭대기에 올라 바라본 넓은 풍경이 영향을 끼친 것이 틀림 없었다. 제 상단을 꾸려 물건이 가득찬 열차를 타고 나아겠다는 그 꿈같은 이야기를 듣노라면 에릭은 그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선두에서 횟불같이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이 굽이치는 광경을. 그러나.
"오빠는?"
너는 커서 뭐가 될거니?
그건 그가 유일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제 어떤 미래도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지금 이 시간에 만족했다. 궂은 일 없이. 잔잔하게. 산 위의 만년설이 녹아 계곡이 되어 흐르고, 그 물이 강이되어 바다로 나아가는 것처럼 당연하게 흐르는 시간이.
다행히 그들은 에릭이 쉬이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선택지가 너무 많기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학문도, 예체능도, 보통 이상으로 뛰어난 아들.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유서깊은 집안과 꿈을 지원해줄 자금줄. 그 모든 것이 준비된 환경에서 한가지를 고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며 제 아들을 응원했다. 하고 싶은 걸 하렴.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