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디 x 아라] Happy new year

w.잭모리스

 

 

 

 

1231, 늦은 밤. 남들이 해돋이를 보러간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간다며 시끄러운 1년 마지막날에 나는 피시방에 있었다. 그것도 아침부터.

 

"9시 방향에 까마귀 둘."

 

"나 스킬 쿨인데."

 

"그럼 죽던가."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기엔 부모님 두분이 길이 막힌다며 쿨하게 포기하셨고 파릇한 연하의 남친과 시간을 보내기엔 그 연하의 남친이 지나치게 파릇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남자친구는 가족들과 송년회를 위해 붙잡혀있으리라. 그래서 약속 없는 동생을 끌고 피시방에서 신년을 맞게된 나는 PvP 지역에서 분을 푸는 중이었다.

 

"나 힐."

 

"스킬 맡겨놨냐. 물약 먹어."

 

"이미 먹었어. 힐 좀 주세요."

 

이러다 죽겠다며 진홍이 우는 소리를 했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가련하게 피가 닳아가는 딸피의 탱커가 아니다.

 

"누나는 전투 전문이에요."

 

들어는 봤니 전투 힐러라고. 대답한 나는 무기를 바꿔끼고 버프를 중첩했다. 신의 이름으로 커플닉을 달고 다니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겠다는 이유였다. 일부러 여자인듯한 쪽을 골라잡고 스킬을 퍼붓는다. 뒤늦게 상대가 반격하려했지만 소용 없었다. 내 컨트롤이 좋은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힐러가 좀비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온라인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을 찢어놓으려 했을 때였다.

 

-누난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가만 안둬~ 흔들리는

 

", 전화요."

 

울리는 핸드폰을 힐끗 바라본 진홍이 전화가 오고있음을 알렸지만 거기에 신경쓸 겨를은 없다.

"딸피 안보이냐. 쟤만 잡고. 잠깐만."

 

몇대만 더 때리면 죽을 것 같은데 물약을 마셨는지 자꾸만 차오르는 피에 집중하는 나를 대신해 이미 캐릭터가 죽어 회색 화면을 띄운 진홍이 핸드폰을 집어든다.

 

"대신 받어?"

 

"그러던가. 누군데."

 

그리고 이어진 말은 피아노 건반마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내 손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님 남친이여."

 

? 잠깐 멈춘 순간 이때다 싶었는지 달려든 커플닉이 내 캐릭터를 죽여 회색화면을 띄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되묻는 내게 진홍이 화면에 뜬 이름을 보여준다.

 

그 손에서 낚아채듯이 폰을 빼앗아든 나는 재빨리 목을 가다듬었다.

 

"으흠, 큼크흠. 아아."

 

그렇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 통화버튼을 누른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내숭이 깔린 목소리에 진홍이 가증스럽다며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지만 가볍게 발을 밟아 비틀어준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보세요를 반복하기 전이었다.

 

"선생님."

 

", 오늘 바쁠거 같다더니. 무슨 일이야?"

 

"잠깐 몰래 빠져나왔어요."

 

그래도 되냐는 질문에 술판이 시작됐으니 자기가 없어진 줄도 모를 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친척들의 명절을 떠올려번 나는 쉽게 긍정했다. 1130. 지금쯤이면 술판이 아니라 화투판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을 시간이니 애들 하나쯤 없어져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목소리도 듣고 좋네."

 

가족 모임이라길래 꼼짝없이 목소리도 못 들을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큰 수확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맘을 달래는 데 수화기 너머로 폭탄 선언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그런데, 얼굴 보러가도 돼요?"

 

", ? 지금?"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차림새를 살폈다. 집 앞 단골 피시방에 온 터라 양말은 수면양말 신발은 어그부츠인 지나치게 편한 차림이었다. 지금부터 집까지 달려가서 옷을 갈아입고 한듯 안한 듯 자연스러운 화장을 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인가. 고민하는 가운데 다행이도 신은 내 편인 모양이다.

 

"거기까지 가려면 한시간 반쯤 걸릴 것 같아요. 할아범 차를 빌렸거든요."

 

먹을 것도 좀 챙겼는데 하는 말엔 더이상 고민따윈 없었다. 연하의 남친이 저를 보러 먹을 것까지 싸들고 온다는데. 심지어 저 집 음식은 보장된 맛을 자랑했다. 한시간이면 변신할 시간도 충분하다. 나는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을 건넸다.

 

"도착하면 말해. 준비하고 있을게."

 

"이따 봐요."

 

그렇게 전화를 끊은 순간부터가 전쟁이었다.

 

"동생, 내 꺼 비전투지역에 옮겨놓고 접속이벤트 보상 받고나서 꺼줘."

 

"? ! 누나! 조아라씨!"

 

"나중에 봐서 접속 보상 못받았으면 죽인다!"

 

등 뒤에서 이러는 게 어디있냐는 둥 진홍이 불만어린 목소리를 내질렀지만 나는 그대로 겉옷에 팔을 꿰며 달렸다. 한시간이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옷 갈아입고, 화장하고.."

 

고데기까진 포기해야할 것 같다. 그나마 오늘 춥다고 머리를 틀어올리지 않은 건 가산점이었다. 내추럴한 생머리 컨셉으로 가자며 빙판에 가까운 길을 조심조심 걸어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으허, 춥춥. 날씨가 미쳤네. 오다 사고나지 말아야할텐데..."

 

뒤늦게 이 빙판길에 차를 몰고 오는 중일 어린 남친 걱정에 푹 숙이고 걷던 고개를 들어올린 나는 집에서 가까운 놀이터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몸을 멈췄다. 가로등 아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사람의 실루엣이 참으로 익숙했다. 핸드폰을 꺼내든 나는 최근 통화기록에서 가장 위에 위치한 번호를 눌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몇번 신호가 이어지고 그네를 타던 남자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선생님?"

 

핸드폰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멀지 않은 놀이터에서 울려퍼졌다. 한시간 후에나 도착한다며. 하는 말에 벌떡일어난 상대가 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이쪽의 위치가 보이도록 손을 들어올린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해. 상디."

 

가로등 아래에 선 얼굴이 난처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며 나는 기어코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그게, 여자들한테 집앞이라고 잠깐 나오라고 하는 건 민폐잖아요."

 

늦은 시간이라 카페도 모두 닫았기에 결국 갈 수 있었던 건 집 앞 편의점이었다. 새빨갛게 얼은 볼에 따듯한 캔커피를 굴리던 상디가 난처한 웃음과 함께 변명한다.

 

"그래서, 거기서 한시간 반을 기다리려고 그랬어?"

 

"안돼요?"

 

그 반문에 할말을 잃은 건 내 쪽이었다. 아니 되냐 안되냐를 물으면 안될거야 없는 행동인데. 지금은 한겨울 엄동설한의 날씨였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거냐는 타박에 상디가 감기는 안걸리를 체질이라 괜찮다며 웃는다. 저게 젊음의 패기인가. 집 앞 슈퍼만 다녀와서 코를 훌쩍이는 내겐 부러운 이야기라 나는 세살 연하의 상디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십대가 좋긴 좋구나."

 

별 생각 없는 말에 나이에 민감한 상디가 그냥 체질이라며 강조한다. 이어서 늦은 시간에 나와도 괜찮냐. 괜찮다. 가족 모임은 즐거웠느냐. 즐거웠을리가 있겠냐는 시덥잖은 일상 대화가 지나간 이후였다.

 

"! 저는 지금 2014년을 마무리하는 제야의 종이 울릴 보신각에 나와있습니다!"

 

우렁차게 소리치는 여자 앵커의 목소리에 고개가 절로 편의점 한켠의 티비로 향한다.

 

", 벌써 열두시 직전이네."

 

화면에서는 사람이 바글바글한 보신각에서 제각기 환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브이나 얼굴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나는 카운터가 시작해도 이르지 않을 시간을 확인하고 웃었다.

 

"그러게요. 제야의 종소리 같이 듣겠네요."

 

"편의점에서?"

 

생각만큼 로맨틱한 장소는 아니라는 말에 동감인지 상디가 웃는다. 아닌게 아니라 둘이 서있는 창가는 평소 학생들이 컵라면을 먹곤 하는 곳이었다. 앉은 의자도 없는 바에서 함께하는 신년이라니 독특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티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10!....9!....8!....7!....6!....5!"

 

모두가 함께 소리지르는 숫자가 천천히 줄어들고.

 

"2...1!!! Happy new year!!"

 

마침내 새해 인사가 우레와 같이 쏟아져 나왔다. 11일을 가리키는 핸드폰을 보며 나는 손을 내밀었다.

 

"올해도 잘부탁해."

 

그러나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는 상디의 표정은 복잡미묘하기 그지없다. 천천히 손을 마주잡고 손가락을 얽은 상디가 고개를 숙이자 금발이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그리고 괜찮냐고 물어봐야하는게 아닐까 싶은 즈음이었다.

 

"이제 스물이에요."

 

그러게.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올 여름, 짧았던 교생실습에서 만난 사이였다. 썸도 타고 한살 두살도 아닌 네살차이에 고민도 하고 한때 선생님과 제자였던 사이라는 사실로 갈등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랬던 상디가 이제 성인이라는 사실에 뭔가 홀가분해져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거 해볼래?"

 

"?"

 

"아니 고딩들 꿈이 그거잖아. 열두시 땡하면 민증 내밀고 담배 사는 거."

 

물론 담배는 안되고 맥주라도 한캔씩 사서 당당하게 술이라도 한잔 하려는 생각이었다. 냉장고로 발길을 옮기려는 나를 여전히 잡고있던 손을 끌어당긴 상디가 고개를 젓는다.

 

"그거 말고."

 

"그럼 뭐?"

 

설마 담배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죽어도 말리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이제 성인이니까. 키스 해도 되죠?"

 

물론 대답할 시간따위는 주지 않았다. 일부러 얼굴의 반이나 가리도록 칭칭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내린 상디가 허리를 숙여 입술을 내린다.

 

".....!!"

 

가볍게 마주닿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이후였다. 찬바람에 갈라진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인 상디가 그것만으로 터져버린 아랫 입술을 안타깝다는 듯이 핥았지만 그뿐이었다. 부드럽게 노크하듯 입술을 두드리는 혀에 입을 벌리자 옅는 피맛과 함께 밀려들어온다.

 

'...편의점인데.'

 

하며 여전히 졸고있는 알바생을 신경쓰던 찰나의 이성은 손바닥이 눈을 덮었을 때 날아가버렸다. 요리기구를 다루는 굳은살 박힌 손과 도망가지 못하도록 등뒤로 두른 팔에 기대서 나는 포기하고 생명줄마냥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고더 한참이나 숨긴 보물이라도 찾는 듯 입안을 훑은 혀는 아쉽다는 듯이 입술을 핥고나서야 떨어졌다.

 

"....."

 

뒤늦게 숨을 몰아쉬며 따지기도 전에 만족스럽게 웃은 상디가 제 코트깃 안으로 저를 끌어들여 안아온다.

 

"Happy new year. 선생님."

 

올해도 잘부탁해요. 하고 귀 옆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달콤했지만 어쩐지 위험한 구색이 있는 것을 결국 나는 모른척하고 마주 안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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