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맑은 날이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햇살은 적당히 따스하고 비와는 관계없는 조각구름이 느리게 흐르는 날. 일도 약속도 없는 온전한 휴일에 루시아는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딱히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득 돌아본 창밖이 너무 아름다웠고 방 안에서 바라만 보기엔 아쉬웠다. 때문에 그녀는 이 귀중한 휴일을 제가 사는 도시를 둘러보는 것에 쏟아 붓기로 했다.
“어디가시나 봐요?”
“그냥 산책이요.”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저처럼 산책을 나가는지 마주치는 이웃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걷는 길은 평소와 같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제가 걷는 길이 노란 벽돌로 포장된 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천천히 이 산책의 가장 첫 번째 목적지를 시내로 잡고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이벤트 쿠폰에 당첨되셨어요!”
“이번에 기획으로 나온 건데, 같이 넣어드릴게요.”
“어머, 마침 하나 남았네요. 계산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별 생각 없이 들린 가게에서 받은 쿠폰과 마침 떨어졌던 화장품을 사러갔던 곳에서 받은 평소에 사고 싶던 립스틱, 맞춘 듯이 잘 어울리는 단 한 벌 남은 옷. 평소라면 하나만 일어났어도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을 일이 마법처럼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네.”
이렇게 되면 기쁘기보다는 무서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루시아는 제 손에 들린 것들을 보며 얼떨떨한 심정을 내뱉었다. 그리고 쇼윈도우에 제 표정을 비추려던 참이었다.
“아, 이거 괜찮다.”
그녀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한 쌍의 시계였다. 시계를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 무거운 팔찌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넘길 정도로 쇼윈도우 안의 시계는 세련되고 예뻤다. 무엇보다.
“1주년 얼마 안 남았지.”
연인과의 1주년 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니 시계는 더더욱 시선을 끈다. 다 낡은 연인의 시계를 바꿔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 마침 둘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계를 발견했다는 건 오늘의 행운이 이어진 결과 같기도 하다.
“조금 비싸긴 한데..”
간식비를 조금 줄인다면 괜찮지 않을까. 가게 앞을 서성이며 고민하던 루시아를 움직이게 만든 건 때마침 가게로 다가오는 커플을 발견했을 때였다.
“밖에 시계 좀 볼 수 있을까요?”
“손님,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이건 이번에 새로 나온...”
그들보다 한발 빠르게 선수를 친 루시아는 문을 열자마자 용건을 말했고 10분쯤 후엔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가지고 길거리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나와서 그녀는 제 손에 들린 상자를 바라보았다. 웃기게도 뒤따라 들어온 커플들이 찾았던 것도 제 손에 들린 시계가 맞았다. 그러나 이미 그 즈음에 그녀는 계산을 마쳤고 남아있던 물건은 하나뿐이었지만. 조금 늦었다면 이처럼 제 마음에 쏙 드는 시계는 이미 팔리고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운이 빠져서 조금 쉬고 싶은 기분이 된 루시아는 근처를 둘러본 끝에 작은 핫도그 트럭과 벤치를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A세트로 주세요. 얼마에요?”
“5달러요. 포장이신가?”
“아뇨, 바로 먹을 거에요.”
그녀는 대답을 증명이라도 하듯 값을 치루고 받아든 핫도그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따끈하게 데워진 핫도그는 배가 고파서인지 몰라도 훌륭하다.
‘이것도 운이 좋았던 걸까.’
어찌되었든 덕분에 맛있는 곳을 발견한 것은 확실해서 루시아는 이 위치를 기억해두기로 하며 손끝에 튄 소스를 핥았다. 그리고 느긋하게 사람들을 구경하며 핫도그를 먹기 시작했을 때였다.
“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루시아는 놀라 떨어트릴뻔 한 핫도그를 받쳐준 남자를 보았다.
“여기있소.”
그녀가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첫 번째, 남자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며 두 번째, 분명 방금 전까지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세 번째, 그가 마치 자신을 잘 아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 감사합니다.”
그러나 덕분에 하마터면 맛있는 핫도그를 비둘기에게나 줘야할 참사를 피하게 된 루시아는 남자의 손에서 순순히 제 핫도그를 받아들었다. 남자는 애초에 저 때문에 놀란 것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되돌리고는 주변을 살피며 초조한 기색을 표했다. 그리고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모양새였다.
“저기 근데 무슨 용건으로..”
덕분에 겨우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놀란 것이 부끄러워졌던 루시아는 질문과 함께 덩달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싶을 즈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런 소리를 하면 미친 것처럼 들리겠지만.”
“뭐가요?”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오. 30분만 나와 함께 자리를 피해주면 안되겠소?”
적당히 미친 소리였다. 호감 가는 외모에 반사적으로 짓던 미소가 걷히는 것을 느끼며 루시아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남자였다. 편안한 코트에 흰 티셔츠와 청바지. 시계를 좀 심하게 차고 있다는 것이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주변에 도와줄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루시아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운을 띄웠다.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아니, 잠깐! 아주 잠깐만이면 되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쉽게 떨어질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좋은 날이었는데 이런 남자 때문에 하루를 망치기엔 너무나도 아쉬워서 루시아는 최대한 좋은 낯으로 남자를 상대했다.
“죄송합니다.”
웃고 있지만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전한 루시아는 벤치에서 일어나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미래에서 왔소!”
아깝지만 쓰레기통에 남은 핫도그를 던져 넣은 루시아는 남자가 외치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들을수록 가관인 것이 아무래도 어디서 탈출한 정신병자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도시 치안을 위해서 신고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5분 거리에 지구대가 있으니 가는 길에 민원을 넣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집에 가면 전화를 걸어야지.’
그리고 제 애인에게 오늘 하루가 어떠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느긋하게 수다를 떨 것이다. 오늘 하루 햇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좋은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끝에 있었던 지금을 말한다면 그는 분명 따스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가며 마지막엔 힘들었겠네. 내가 곁에 있어 줬어야했는데 같은 달콤한 위로를 건네겠지.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이 불쾌한 일은 작은 헤프닝으로 여겨지고 이윽고 일상 속에 묻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옮기는 찰나였다.
“내 말을 믿어주시오! 루시아!”
초면인 남자의 입에서 외쳐진 제 이름에 루시아는 몸을 돌렸다.
“당신, 내 이름은 어떻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가득한 제 시계들을 내려다본 남자가 혀를 차며 손목을 잡아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어서는 안되오. 제발, 나를 믿어주시오.”
“믿고 자시고 지금 뭐하는 거에요! 놔요!”
막무가내로 끌고 가려는 남자와 거부하는 루시아의 사이에 실랑이가 이어진다. 손목이 아프다는 듯 작게 지른 비명에 잠시 남자의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잠깐!”
남자의 손을 뿌리친 루시아는 제 짐을 챙겨 인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잠시만요..!”
“그쪽은 아니되오! 멈춰서 제발 내 말을 들어주시오!”
뒤에선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디로 가야하지? 누구한테든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며 달리던 그녀의 속도가 줄어든 것은 아까 그 벤치에서 겨우 모퉁이 하나를 돌았을 때였다.
“어..”
그게 겨우 그녀가 낼 수 있는 소리였다. 달리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고 마침내 멈춰 선다. 따라오던 남자가 제 어깨를 붙잡은 것이 느껴졌지만 루시아는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이런...”
등 뒤에 선 남자가 낭패라는 듯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모르는 여자와 팔짱을 낀 채 길을 걷고 있었다. 여자가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의사를 묻자 남자가 익숙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여자의 볼에 입 맞추는 남자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느껴졌다.
그녀가 잘 아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나치게 낯설어서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하는 루시아의 눈이 커다란 손에 덮여 가려진다.
“보지 마시오.”
남자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들 간의 거리는 조금 멀었지만 그녀는 그 익숙한 얼굴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 웃음. 그 몸짓. 걸음걸이와 웃을 때 살짝 찡그리는 그 사소한 습관까지 눈 감고도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데.
그녀가 본 것은 1년 넘게 함께한 애인의 외도였다.
손바닥이 축축한 것을 느꼈는지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남자가 그 몸을 돌려세운다. 방금 전까지 도망치던 대상인데도 루시아는 이번엔 반항 없이 순순히 몸을 돌렸다. 함께 울 것처럼 찡그린 남자가 엄지를 들어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울지마시오.”
제발. 남자가 속삭였다.
“당신이 울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소. 그러니 제발 울지 마시오.”
그러나 그럼에도 루시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조용히 우는 작은 몸을 제 품에 가두어 안았다. 우는 여자와 달래는 남자는 주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그런 것 따윈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의 코트를 구기듯 움켜쥐고 루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울지마시오. 스위티. 내가 잘못했소.”
머릿속은 복잡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무엇부터 해야하는 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울지 마시오. 마치 마약처럼 복잡한 머리위로 계속해서 달콤한 위로가 쏟아졌다.
그녀가 울음을 그칠 수 있었던 건 족히 30분은 지난 후였다.
“다 울었소?”
“시끄러워요.”
근처의 노천 카페에서 부은 눈에 대고 있을 수 있도록 차가운 병 음료를 건네는 남자에게 부끄러워진 루시아는 타박했다. 퉁명스러웠을 텐데도 남자는 드디어 울음을 그쳤다는 것이 기쁜지 한시름 덜은 표정이었다.
“제대로 설명해줘요.”
“믿지 못할거요.”
“1년 사귄 건실한 애인이 바람피는 걸 목격한 것보다 더요?”
비슷하오. 하고 대답한 남자는 저를 사이퍼라 소개했다. 급이 낮은 사이퍼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루시아는 금방 납득했고 남자는 볼을 한번 긁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시공간 능력자 릭. 그는 제가 5년 후에서 왔으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곤 연인 사이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래서, 왜 나한테 나타난 건데요?”
“그대가 오늘을 최악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오. 릭의 사과에 루시아는 순순히 긍정했다. 아까까지 좋던 기분은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눈앞의 남자가 없었더라면 아마 그녀는 멍청하게 거리에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끙끙 앓았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애인에게 제가 본 것을 이야기 할 것인가 고민했겠지. 릭은 커피를 홀짝이며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커피잔 너머로 힐끔거리는 것을 발견한 루시아는 픽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지금의 나랑은 초면이네요.”
“그렇지.”
우리가 언제쯤 만날까요? 하는 질문에 릭은 곰곰이 따져보더니 일년 후면 만나게 될 거라며 대답했다. 마음을 추스르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루시아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적당하게 운을 띄우며 손을 내밀었다.
“알고 있겠지만, 루시아에요. 스물네살.”
내밀어진 손을 릭은 한참이나 기묘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주잡았다.
“릭 톰슨. 서른 세 살. 회사원이오.”
5년을 사이에 두고 그들이 처음 만나게 된 날이었다.
Behind
그녀를 처음만난 날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인사해. 이쪽은 내 아내.”
“안녕하세요. 루시아라고 해요.”
그들은 누가보아도 행복해 보이는 신혼의 부부였다. 그녀의 남편은 릭 자신과는 회사 동료로 얼마 전 결혼한 아내를 소개하겠다며 저녁식사에 초대한 날이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내미는 손을 릭 톰슨은 목이 졸린 것처럼 잠긴 목소리로 마주잡았다.
“반갑소. 릭 톰슨이오.”
식사는 화기애애했다. 그는 맞지 않은 자리에 온 것마냥 고기를 헤집으며 웃었지만 마주 앉은 그들은 상대가 덩달아 행복해보일 정도로 웃음이 넘치고 친절하며 상냥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술이 들어가자 분위기는 더 부드러워졌다.
“그러니까, 그때 루시아가..!”
“쉿!”
긴장이 풀린 동료가 적당히 붉어진 얼굴로 꺼내는 실수담을 루시아가 말린다. 아웅다웅 정겹게 싸우는 모습에 툭 난처한 질문을 던져버린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찰나의 실수였다.
“혹시 싸운 적은 없소?”
릭은 무례한 질문에 뒤늦게 사과하고 거두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빨랐다.
“있었지. 아마 그게 제일 크게 싸웠던 걸걸?”
“거의 헤어질 뻔 했거든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릭에게 웃음이 헤퍼진 동료가 감춰진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프로포즈하려고 반지를 사려는 데, 도저히 내가 그런 쪽엔 관심이 없어서....”
흔한 이야기였다. 서투른 남자는 근처에 사는 사촌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걸 재수도 없게 마주친 루시아가 오해하고 이별을 고한 끝에 이러저러한 사건을 넘어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날 선물로 주려고 커플 시계까지 샀었는데 그런 꼴을 봤으니, 내가 화를 안내요?”
“오해할만하게 만들어서 미안했어.”
오해할 만하긴 했었다며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는 부부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연못에 던져진 파문과도 같았다.
그리고 시간을 건너 일방적인 그 첫 만남에서 내밀어진 그 손을 릭은 천천히 마주잡았다.
그 순간 그의 수많은 시계들 사이에 특별한 시계하나가 원래 있었다는 듯 나타나 끼어들었다는 사실은 남자 본인만이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