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는 아이를 달래듯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줄은 몰랐는데.

 

마치 한탄 같기도 했고 동시에 탄식 같기도 하다. 누구 목소리지. 레오나드는 아직 수면아래 잠긴 몽롱한 정신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어디에서 들었더라. 달래는 것이 익숙한 억양이었다. 다정한 말씨. 반사적으로 제 젖형제를 떠올린 레오나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으른 짐승조차 이렇게 나태하고 방탕하게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전하.

 

아니다. 그는 속으로 다정할 지언 정 입에서 나오는 것은 신랄한 자였다. 짐승, 인간답게.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이 살이 에일 듯이 춥다. 단순한 젖형제치곤 도를 넘는 언사겠지만 그에 레오나드는 처벌을 내린 적은 없었다. 그 지나친 비난에는 저를 향한 걱정과 애정이 담겨있음을 알기 때문이라.

 

그렇다면 그 목소리는 누구지. 그러나 기억을 더듬는 것은 약에 절은 머리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약. 제 상태를 알아챈 순간 레오나드는 뒤늦게 갈증을 느꼈다. 찰나의 쾌락을 즐긴 다음날이면 으레 찾아오던 증상이었다.

 

‘하지만 어제 약은 질이 나쁘거나 양이 과했나..’

 

덩달아 찾아오는 두통에 레오나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정상적으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라지만 대공저에 들어오는 물건이니 만큼 전자보단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

 

시종을 잘라야겠군. 그러나 그보단 우선 목을 축이는 쪽이 급하다. 그렇게 누구든 부르기 위해서 종을 흔들려던 차였다. 그는 뒤늦게 몸이 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침대에 붙박인 듯 팔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니 팔 뿐만이 아니다.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사지에 레오나드는 미간을 구겼다. 정말로 과했던 모양이다.

 

동물원의 원숭이조차 이처럼 꼴사납진 않으리라. 자조한 그는 천천히 손끝과 발끝부터 몸을 깨우려 노력했다. 아무래도 깨어난 것은 정신뿐인듯 싶었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다보면 종종 있는 일이다. 이럴 때 팔다리를 주물러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막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참이었다. 

 

제국의 장마는 길다. 한 달하고도 보름동안 이어지는 장마 동안 지붕을 뚫을 듯이 떨어지는 빗방울은 제법 크고 아파서 살결이 부드러운 여인이나 아이가 맞는 다면 근육통을 호소할 정도였다. 성인 남성들조차 그 빗속에서 오래 있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러니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대비를 마쳐두고 장마기간에는 집안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최소한의 인력만을 둔 채 제국은 국가 전체가 휴식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도 제국인이고 그 저택이 수도에 있는 만큼, 며칠 전 레오나드는 사용인들에게 저택을 완전히 비우라 명하고 못미더운 듯 자리를 뜨지 못하는 젖형제까지 제 손으로 배웅했다. 사용인은 없고 잔소리를 할 젖형제는 제 어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다.

 

그 다음엔 뭘 했지.

그리고. 그러고 나선. 생각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도돌이표처럼 맴돈다. 기척이 들린 건 그때였다.

 

“벌써 일어나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레오나드의 상념을 끊고 누군가 말을 걸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계속 이 방안에 있던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용인이 남아있었던가. 물을 요구하려던 레오나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만히 혀를 굴려보자 둥글고 단단한 것이 입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게 뭐지. 그러나 그 정체를 알아채기엔 뇌는 아직 활동을 멈추고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다. 고민하는 레오나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자가 이마를 짚어 열을 재보는 듯한 행동을 했다.

 

열이 있네요. 목소리의 주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드럽고 상냥한 말씨. 그 말대로 열이 나는지 이마를 짚은 손이 시원했다. 잠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입을 막고 있던 무언가가 벗겨져나간다. 레오나드는 입을 열었다.

 

“....물.”

 

“그래서 일어났군요.”

 

하지만 물을 마시면 당신만 힘들어질 텐데. 남자가 말하는 것을 레오나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계속해서 물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들린다. 머리맡에서 들리는 물을 따르는 소리. 반사적으로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나 앉으려던 레오나드는 여전히 꿈쩍도 않는 몸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

 

-.....줄은 몰랐는데.

 

달콤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였다. 흐릿한 시야. 감기는 눈 사이로 누군가를 봤더랬다. 누구였지. 레오나드는 손에 잡힌 금속제의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바늘이 들어가 있어서 그러면 안돼요.”

 

힘줄이 돋아나도록 주먹을 쥐는 손을 진정하라는 듯 섬세한 손이 토닥인다 목 아래로는 감싸 안 듯이 단단한 팔이  들어왔다. 팔을 넣은 남자가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받쳐준다. 환자를 대하는 것이 익숙한 태도였다. 입가에 컵이 닿는가 싶어 입을 벌리자 물을 흘려 넣는 손길이 능숙하다. 차갑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물을 레오나드는 달게 마셨다. 남자의 옷에선 희미하게 소독약 냄새가 난다.

이윽고 한잔을 모두 비워 마지막 한 방울이 흘러 들어올 때까지 목을 축인 레오나드는 아쉬움에 입술을 핥았다. 조금 더. 그러나 안 된다며 거절한 남자는 제 머리를 도로 베개위로 내려놓는다.

 

무언가 입술 사이를 벌리고 들어와 헤집어 보더니 다시 둥근 무언가를 밀어 넣고 나갔다.

 

“다행히 이는 상하지 않았네요.”

 

하고 남자가 말하고 나서야 레오나드는 제 입안으로 들어왔던 게 남자의 손가락이었음을 알았다. 부드러운 천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눈 위를 가볍게 누르는 느낌이 난다.

 

“그럼 이제 더 자요.”

 

이 목소리다. 목을 축이고 나자 도로 잠으로 빠져들려는 몽롱한 정신으로 레오나드는 확신했다.

 

-.....될 줄은 몰랐는데.

 

계속 귓가를 맴돌던 아이를 어르듯 달콤한 목소리. 누구지. 확인해야한다. 그렇게 생각해놓고도 레오나드는 제가 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하는지 몰랐다. 다만 본능과도 같다. 레오나드는 제 손에 잡히는 천 조각을 움켜쥐었다. 남자가 곤란한 소리를 낸다.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목소리. 흐릿한 시야. 감기는 눈 사이로. 누구였지. 답답한 머릿속을 쥐어짰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동물들이 위협적으로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근육이 긴장한다. 아직, 더, 자요. 그 몸을 뒤덮듯이 끌어안은 남자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조금 더.

 

“일어나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발버둥치는 팔에 익숙한 굵기의 가는 금속이 꽂히는 느낌이 난다.

 

레오나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느리게 힘주어 피스톤을 누르면 투명한 액체가 빨려들어가듯 피부 아래로 퍼져나가겠지. 아주 천천히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마침내 그는 남자가 했던 말을 모두 떠올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번쩍이는 번개 속에서 들었던 그 말은 한탄이었나 탄식이었나. 레오나드는 나락처럼 잠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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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 201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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