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오르슈팡] 그대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잭모리스 2016. 12. 12. 00:19

 

-그대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어느 날 하이델린이 말했다.

-그대의 공으로 빛의 전사는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희생으로 에오르제아는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행복해보이지 않는군요. 이것이 당신에게 합당한 보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며 건네주는 바구니 안에는 새하얀 알이 폭신한 방석 위에 놓여있다. 하나. . . . 다섯 개. 정확하게 다섯 개의 알을 그는 몇 번이고 수를 헤아렸다. 많은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그것들을 받아든 순간 이미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으므로.

-과오를 되짚어 고치고 나아가세요. 은빛 검날.

첫 번째 알을 깨고 오르슈팡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작은 집 앞에 서있었다. 식사를 준비하는지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은 부유해보이지는 않았으나 따스함이 흘러넘친다. 돌을 쌓아올린 벽으로는 담쟁이가 타고 올랐고 실바람이 통할 정도로만 열린 창 앞에선 작은 화분들이 줄지어 볕을 쬐고 있었다.

파슬리, 세이지, 로즈마리, 타임.

마르지 않은 허브 잎사귀가 손 안에서 뭉그러진다. 향긋한 그 향이 어쩐지 비명처럼 느껴져 오르슈팡은 빈손을 쥐었다 폈다. 망설이던 손은 한참만에야 창문에 닿는다.

-끼익

경첩이 한차례 비명을 흘리며 길을 열었다. 활짝 열린 창문 안으로 방안의 풍경이 비친다. 커튼의 움직임에 따라 파도치는 햇볕과 옅은 그늘, 그가 찾던 것은 그 아래의 작은 요람에 있었다.

아우-?”

한쌍의 눈동자가 침입자를 향해 또렷하게 시선을 맞춘다. 요람의 주인은 한창 제 발가락을 입에 넣으려 씨름하던 중이었다. 펄럭임이 심해진 커튼에게 시선을 빼앗겼다가 침입자를 발견한 아기는 입을 오물거린다. 집중이 풀린 손아귀에서 놓여난 발이 튕겨지듯 허공을 차냈다.

아부!”

의심도 경계도 배우지 않은 무지한 생명체가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뻗어진 손끝이 먼지를 터는 것처럼 조심조심 뺨에 닿았다. 낯선 손이 의심스러운지 조금 찌푸렸던 아기는 두 손을 뻗어 커다란 손을 가득 쥐었다. 만족스러움에 꺄르륵 웃는 얼굴이 못내 사랑스러워 오르슈팡은 울 것 같은 기분을 억눌렀다.

벗이여-.”

기쁨은 짧고 슬픔과 절망은 길 것이다. 빛의 전사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은 구원을 요청할 것이고 보상은 이름뿐인 명예로 남을 것이다. 오르슈팡은 손을 뻗었다. 힘차게 심장이 뛰는 가슴을 지나 오른 손이 조심스럽게 가냘픈 목을 감싸 쥔다. 고통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의 벗은 아직 연약했으므로. 그를 옭아매던 빛의 가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태어나주어 고맙네.”

목을 조르는 대신 갈색 고수머리를 쓸어 올린 오르슈팡은 드러난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그대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할지라도 나는-.’

굵게 방울진 눈물이 떨어지기 전 얼굴을 떼어낸 오르슈팡은 손끝이 조심스럽게 아기의 얼굴을 덧그린다. 이제 그는 이 모습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었다. 집의 안쪽에서 기척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누구세요?”

그의 벗은 아직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다. 다음에 다시. 작은 이마에 입술을 내린다. 방으로 들어온 여자는 활짝 열린 창문 아래 홀로 웃는 아기를 보았다. 방안에선 때 아닌 겨울바람의 내음이 났다.

 

소년은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있었다.

하나! ! 세엣!”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닌 기사를 흉내 낸 듯 어설픈 폼으로 휘두르는 나뭇가지로는 도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할 듯 엉성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었지. 오르슈팡은 처음 커르다스에 당도했던 모험가를 떠올렸다. 아직 어설픈 이였다. 야만신을 몇이나 쓰러트렸다던 그는 정작 커르다스의 추위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코끝이며 뺨이 꽁꽁 언 채로 전진기지를 찾았더랬다.

부탁하셨던 일입니다.’

제 친우의 무죄를 밝히는 서신을 건네던 손끝에 피어났던 새빨간 꽃을 오르슈팡은 기억한다. 그 손에 따스한 코코아를 쥐여 주고 싶었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알지 못했다. 생각에 너무 깊게 빠져있던 탓일까. 발치에 걸린 장작더미가 우르르 무너지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는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썼다.

누구세요?”

소년이 뒤를 돈다. 제 얼굴이 제대로 가려졌는지 확인한 오르슈팡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호칭이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목젖을 찌른다. 울음과 사죄를 뒤로하고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안녕.”

울음이 섞인 인사는 경계심서린 소년의 뒷걸음질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를 아세요? 소년의 물음에 오르슈팡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를 알아. 세상을 구할 영웅이지.”

제가요?”

하지만 그대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에선 기쁨보다 슬픔과 절망이 길게 이어질 것이네. 모두가 그대에게 도움을 청하겠지만 그들의 절반은 곤경에 빠진 그대를 외면할 것이고 절반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겠지. 세상을 구하였다 칭송받았지만 그대의 그 최후는 외롭고 비참한 것이었다.”

홀로 차게 식은 시신을 오르슈팡은 기억했다. 방패는 부서졌고 검날을 깨어졌다. 함께한 이가 없기에 그의 마지막 말을 들은 사람도 없었다. 영웅의 마지막이라기엔 초라했고 사람들은 그의 묘지만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찬미의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과 뒤를 장식한다. 그는 없는 데도. 오르슈팡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원한다면 지금 여기서 더 이상 괴롭지 않게 해주겠네.”

내가 자네를 아프게 할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손을 뻗어 머리칼에 달라붙은 잎사귀를 떼어주었다. 움찔거리며 손길을 피하려던 소년이 잎사귀를 받아들고 머쓱하게 입을 다문다. 그 사이 오르슈팡은 천천히 소년의 모습을 눈 안에 새겼다. 길고도 짧은 시간 후 머뭇머뭇 소년이 입을 연다.

내가 도망가면 어떻게 되요?”

오르슈팡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이 멸망하겠지. 그러나 한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야만 지속되는 세상에 더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 그의 저울은 오래전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있었다.

나는 커서 사람들을 지켜주는 멋진 전사가 될 거에요.”

그러나 소년은 달랐다.

그래서 촌장님네 텃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멧돼지도 해치우고 제국군이 훔쳐갔다는 뒷집 할머니의 반지도 찾아올 거에요.”

사람들은 그대에게 보답하지 않을 거야.”

괜찮아요.”

고개를 저은 소년이 나뭇가지를 들고 씩씩하게 웃는다. 괜찮습니다. 잊혀진 줄만 알았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사람들이 웃어주면 나는 행복해요.”

-사람들이 웃음을 되찾는다면 저는 행복합니다.

그의 벗은 아직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다. 오르슈팡은 몸을 일으켰다. 순순히 물러나는 그가 이상했던지 소년이 의아한 빛을 띈다.

다음에 다시.”

곧 제7재해가 온다. 세 번째 알을 깨고 오르슈팡은 숨을 들이마셨다.

 

저기 보이는 저 도시가 울다하라네.”

청년은 초코보 수레에 몸을 싣고 있었다. 토기가 올라오는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인 뒷통수엔 짧은 갈색의 머리칼이 모래를 뒤집어쓰고 있다. 사막을 건너온 것일까. 간소한 차림과 짐. 뒤집어쓴 로브를 벗어줄 수 없음에 안타까움을 삼키는 사이 청년은 팔을 휘저어 기어코 초코보 수레를 세운다.

우욱-!”

에테르 멀미구만.”

마부가 흔한 일이라는 듯 연초를 피운다. 후들거리는 제 무릎을 붙잡고 선 청년을 보며 오르슈팡은 로브주머니를 뒤적였다. 위스키봉봉. 추운 커르다스에서 몸을 녹이기 위해 먹던 소리를 내며 먹던 것이다.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빈속을 게워내려는 청년을 보며 흩어졌다. 오르슈팡은 초콜릿과 함께 제 손수건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누가 준 것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받아든 청년이 입가를 닦으려다 멈칫한다. 힐끗 눈치를 보는 모습에 오르슈팡은 고개를 저었다.

버려도 괜찮네.”

감사합니다. 다시 인사한 청년이 초콜릿을 입에 넣는다. 입안에서 이리저리 초콜릿을 굴리는 지 번갈아 불룩해지는 볼에서 시선을 돌린 오르슈팡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울다하를 복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왜 그냥 마을에 머무르지 않았나.”

어쩌면, 청년이 고향에 남았더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험가가 아닌 다른 평범한 사람이 되었더라면 원예가나 목수가 되었더라면. 자신과 만나지 못했더라도 행복했을 텐데. 그런 바람이 담긴 말에 청년이 고개를 든다.

7재해 이후 마을로 돌아갔는데 흔적도 없더군요. 지금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유감이네.”

땅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흩어졌으니 누가 고향을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청년이 설핏 웃음 짓는다. 깔끔한 맛의 웃음은 아니었다. 청년의 얼굴은 기억하는 것보다 앳된 동시에 성숙했으며 조금 더 지켜있고 조금 더 활기에 차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모습들이 혼란스럽게 엉킨다. 그래서 오르슈팡은 다시 간청했다.

아직 내 제안은 유효하네.”

부디 힘든 길을 걷지 말아. 이제 청년에게 남은 행복은 더 없이 짧았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갖은 고통 속에 스러진 영웅이 되느니 꽃잎이 지기 전 떨어진 꽃송이가 되기를 바랐다.

당신은...”

놀람을 담은 눈동자가 가려진 후드의 안쪽을 탐색하듯 훑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눌러쓰며 오르슈팡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가설에 확신을 얻은 청년이 피곤한 기색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당신은 알고 있었겠군요. 7재해가 오리라는 것을.”

그래.”

그게 당신이 말한 고통입니까?”

오르슈팡은 조금 웃었다. 그대의 고통이 고작 그런 것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을이 사라지고 기후가 바뀌고 세상이 뒤집히는 재해가 오더라도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아 나아간다. 하지만.

아닐세.”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입매가 비틀린다.

그대에게 닥칠 시련과 고통은 보다 깊고 넓어, 나는 그대가 그것들을 겪기를 원치 않아.”

그러나 이번에도 청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영웅이 될 생각이 없지만, 도망갈 생각도 없습니다.”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청년은 그대로 그를 두고 수레로 돌아가 앉는다. 청년을 싣고 수레는 울다하로 향한다. 그 모습을 오르슈팡은 끝까지 지켜보았고 청년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벗은. 네 번째 알을 깨고 숨을 들이마신다.

 

모험가는 눈밭에 있었다. 날카로운 서부의 빙벽 위에서.

자잘한 나뭇가지를 모아 작은 불을 피운 그 뒷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모험가다. 아기와 소년과 청년의 모습이 그 등위로 겹쳤다. 그들보다 지치고 피로해보였지만 보다 더 강인하고 올곧은 등이다. 오르슈팡은 모험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법으로 쳐진 장벽으로 감싸인 성. 모험가는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다.

-사박.

부러 낸 눈이 밟히는 소리에 모험가가 고개를 든다. 얼굴에 서리는 반가운 빛을 보며 오르슈팡은 제가 뒤집어쓴 후드와 제 뒤를 확인했다. 그러나 맑게 갠 이 빙벽위엔 오직 둘뿐이다. 갑옷에 쌓인 눈을 털고 일어나는 모험가를 보며 오르슈팡은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이 올 것 같았습니다.”

이번엔 모험가가 먼저 다가와 눈앞에 선다. 기다리던 누군가와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가 고개를 저으려던 때였다.

오르슈팡.”

뻗어진 손이 후드를 벗겨낸다. 차가운 바람에 후드 안에 갇혀있던 머리칼이 휘날렸다.

여기까지 와서야 알았지 뭡니까.”

당신일지도 모른다는 걸. 품을 뒤적인 모험가가 손수건을 건넨다. 포르탕가의 문양이 새겨진 그것은 방금 전 그가 멀미를 겪던 청년에게 빌려준 것이다.

원래의 당신은 지금쯤 이슈가르드에서 대관식에 참석하고 있을 걸 압니다.”

오르슈팡은 답하지 못했다. 변명을 해야 하는 지, 제안을 해야 하는 지 그는 종잡지 못했다. 그저. 그저.

여기 있는 건 내 죽음을 본 당신이겠지요.”

씁쓸하게 웃은 모험가가 장갑을 벗어 제 눈가를 훔쳐 준다. 그 손끝에 묻어나는 물기를 보고서야 오르슈팡은 제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한번 자각한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뻗어진 손이 모험가의 얼굴을 어깨를 팔을 짚었다 떨어졌다. 오르슈팡은 무릎을 꿇었다.

제발 내가 그대를 돕게 해.”

그것은 고백이고 애원이었으며 간청이었다. 모험가의 갑주 위로 이마를 기댄 오르슈팡은 하염없이 울며 말을 이었다.

벗이여, 제발.”

한마디만 해준다면, 긍정의 한 자락만을 내게 내려준다면 나는 무엇을 걸어서라도 그대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나 그의 애원을 들으며 모험가는 말이 없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모험가는 손을 들어 오르슈팡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당신이 경고한 대로 제 인생은 기쁨과 행복보다 슬픔과 비탄이 길게 이어졌고, 제 도움을 받은 이들의 절반을 저를 외면했고 절반은 칼을 겨누었습니다.”

부드러운 손길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빗어 정리한다.

하지만 슬펐을지언정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경건히 이마에 입을 맞춰준 모험가는 올곧은 얼굴로 웃었다. 제발. 이은 간청에도 고개를 저은 모험가는 그의 손을 끌어 모닥불로 향한다.

따듯하게 데운 침대도, 잔을 나눌 술도 없지만 시간은 많군요. 어떻습니까.”

새벽이 밝았다. 모닥불은 꺼진지 오래였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빈자리를 바라보며 오르슈팡은 입김을 내뱉었다.

아직.

그의 벗에겐 행복이 남아있다. 마지막 알을 깨고 그는 숨을 들이마신다.

웬 놈이냐!”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환히 불이 켜진 집무실 안이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등장에 놀란 코랑티오가 검을 빼어들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성의 없이 밀어낸 오르슈팡이 탁자 위에 부러진 검과 방패를 올린다.

맹우에 관하여 전할 말이 있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 오르슈팡을 후드를 벗었다.

 

어느 날 하이델린이 말했다.

-그대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바닥을 뒹구는 수많은 깨어진 알들. 그 사이에서 모험가는 새것을 찾아 주워들었다. 파삭. 손 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에테르가 흐른다. 모험가는 숨을 들이 쉬었다.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