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아이스파] 부고 上

잭모리스 2015. 11. 10. 15:13

 

 

 

 

 

부고가 도착한 건 그날 아침이었다.

 

 

 

[아이스버그 X 스팬담 / 질문 642번, 부고를 작성하라.]

 

W.잭모리스

 

 

 

 

“...가 죽었답니다.”

 

칼리파가 그렇게 전했을 때, 스팬담은 살짝 덜 익힌 스크럼블에그와 바짝 구운 소시지, 그리고 생크림을 듬뿍 올린 핫케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달각. 소시지를 자르던 손이 멈춘다.

 

누가?”

 

아이스버그가요.”

 

오늘 아침에 들어온 소식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멀다고 스팬담은 생각했다. 장관? 칼리파의 부름에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손은 여전히 멈춘 채였다. 시간과 침묵이 한 몸처럼 흐른다. 옆에서 대기하던 칼리파는 재촉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해드릴까요. 성희롱이지만.”

 

안경을 치켜 올린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서야 정신을 차린 스팬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는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죽었다는 거지 그녀석이?”

 

.”

 

다음 소식.”

 

스팬담의 요구에 칼리파는 할 일을 재개했다. 팔랑, 서류가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다음 소식입니다. 하루는 짧고 그가 처리해야하는 일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밤사이 쌓인 정보들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스팬담은 썰어낸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임펠다운 근처에서 이상해류가 발생하여...”

 

식당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간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칼리파가 자료를 읽어주는 소리. 그 사이에서 스팬담은 종종 결정하거나 질문을 던지며 천천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스크램블 에그에 간이 약하군. 내일은 소금을 더 치라고 해야겠어.’

 

이상입니다.”

 

아침보고는 정확히 그가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끝이 난다. 평소와 다름없는 양을 섭취한 스팬담은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던 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

 

목적어도 주어도 없는 질문에 칼리파가 반문했다. 성희롱입니까. 식탁 위로 사용한 냅킨을 올려놓은 스팬담은 덤덤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사인이 뭐래? 질문의 대상을 알아챈 칼리파가 덮어둔 서류철을 도로 열었다. 팔랑팔랑, 한참을 넘어간 서류가 어느 장에서 멈춘다.

 

사고사랍니다.”

 

그렇군.”

 

대답한 스팬담은 일어섰다. 작업공의 실수로 배가 무너졌는데 그 아래 시민 아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이는 구했지만. 칼리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대리석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소음 방지 패드라도 붙이라고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스팬담은 혀를 찼다.

 

장례식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해본 스팬담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얼굴은 비춰야겠지.”

 

그럼.”

 

스케쥴을 조정하기 위해 칼리파가 수첩을 펼쳐들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일정사이로 장례식에 방문할 틈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는 칼리파를 보며 스팬담은 의자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오늘 워터세븐으로 출발하는 가장 마지막 열차로 잡아둬.”

 

? 그럼..”

 

딱히 업무시간까지 빼서 가야할 정도의 사이가 아니지. 우리가.”

 

갔었다고 방명록에 남길 정도면 충분해. 대답한 스팬담은 집무실로 걸음을 옮긴다. 길게 늘어진 일정 가장 끝에 하나를 더 추가한 칼리파가 그 뒤를 따랐다. 화환은 어떻게 할까요. 칼리파의 질문에 스팬담은 적당히 알아서 하라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어차피 그 녀석들 내가 보낸 건 바로 쓰레기통에 쳐 박을 테니까.”

 

그렇군요.”

 

그렇게 쉽게 긍정하지 마!!”

 

순순히 긍정하는 칼리파의 태도에 스팬담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쩌렁쩌렁 복도에 울리는 신경질에 칼리파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성희롱입니다. 하고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것으로 그 주제에 대한 대화는 끝이었다.

 

 

닿아야만 쓰라린 얇게 베인 상처처럼, 아이스버그의 부고는 말없이 그의 하루를 따라다녔다.

 

짜바랍! 재브라가 급사 캐서린에게 또 차였다!”

 

후쿠로 너 이 새끼!”

 

문 좀 부수고 다니지 마라.”

 

서류를 처리하면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그리고 아무것도 아닐 때에도 문득 다시 생각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인의 부고였다. 그들이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해도 신경 쓰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

 

스팬담은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평가했다. 본디 애정으로만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다. 그의 사랑엔 증오가 따라 붙었고, 자신의 사랑엔 과거가 따라붙었다. 집게를 든 스팬담은 각설탕을 쌓아올린다.

 

허술하게 쌓인 아래와 다르게 위로 갈수록 견고하게 천천히.

 

그렇게 쌓아올린 각설탕 탑은 꽤 멋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아주 조금 각설탕을 올리던 손이 흔들렸을 뿐인데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저분하게 무너진 탑을 보며 그는 집게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시작했더라?’

 

톡톡. 생각에 빠진 스팬담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장관님, 치워드릴까요? 장관님.”

 

내버려둬.”

 

그렇게 말한 그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구겨 넣었던 추억처럼 미간이 옅게 찌푸려진다. cp들이 문을 닫고 집무실을 나섰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시작을 붙잡았다.

 

워터세븐의 응접실이었다.

 

좋아해. 스팬담.”

 

사법의 섬 유지보수 재계약을 위한 방문했던 그는 교섭 중간, 휴식시간에 차나 한잔 하지 않겠냐는 아이스버그의 제안에 따라 응접실에11 독대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사나운 얼굴로 커피만 노려보고 있던 스팬담은 폭탄선언에 혀를 씹었다.

 

그래... , ?!”

 

정작 폭탄을 터트린 당사자는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편안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아이스버그는 부러 오랫동안 찻잔에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엄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상대가 속이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툭 한마디를 던진다. 확답을 받은 스팬담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 , , ..!”

 

완성되지 못한 단어들을 쏟아내는 스팬담을 보면서 아이스버그는 제 고백의 여파를 구경했다. 후하후하. 한참만에야 숨을 가다듬은 스팬담은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그대로 멈춘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군.’

 

그렇게 생각한 아이스버그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스팬담이 다시 입을 연 건 그가 차를 모두 비웠을 때였다. 어깨가 들썩이던 스팬담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아이스버그는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으핫하하하! 이 몸을 좋아한단 말이지!”

 

그래.”

 

그렇다면 지금 당장....”

 

참고로, 고백을 수락하지 않으면 재계약은 하지 않을 거야.”

 

내게 무릎을......?! 어째서!”

 

기세 좋게 소리치는 스팬담을 꺾은 아이스버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좋아하니까. 그 고백에 스팬담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게 좋아한다는 녀석의 태도냐! 좋아한다면, 그 뭐냐, 내게 매달려야지!!”

 

사랑해달라고 빌어야하는 게 정상이 아니냐며 소리를 지르는 스팬담의 앞에서, 아이스버그는 태연하게 코를 후볐다. 그건 싫어. 단호한 태도에 스팬담이 답답한 가슴을 쳤다. 저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빌어도 받아줄까 말까한 판에! 그러거나 말거나 새끼손가락을 티슈에 쓱쓱 닦아 마무리한 아이스버그는 몸을 당겨 일어나 앉았다.

 

거절시 사법의 섬 유지보수 재계약은 물론이고 앞으로 갈레라는 해군선을 만들지 않을 거다. 물론 해군 측엔 그쪽이 원인이라고 말할 거야.”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협박이었다. 해군선의 85%가 갈레라에서 건조된다. 해군뿐만 아니라 세계정부 전체의 80%이상이 그랬다.

 

그런데 그걸 중지하겠다고? 그것도 자기 이름을 팔아가며?’

 

어이가 없어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입을 쩍 벌린 채 그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듣고 있던 스팬담은 주머니에서 진통제를 꺼내들었다.

 

, .”

 

고맙...겠냐!!”

 

통째 입에 넣고 탈탈 터는 그에게 아이스버그가 미지근한 물을 따라 건넨다. 버럭. 소리를 지른 스팬담은 일단 약부터 삼킨 다음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거절시 일어날 일에 관하여.

 

그렇게 된다면 분명 세계 정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당장에 압박을 가하겠지. 아이스버그에게. 그리고 원흉이 된 자신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역사에 새겨질 자신의 이름이 파스스 흩어지는 환영에 스팬담은 아득 이를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불리했다.

 

“...좋아한다는 녀석이 협박이냐!”

 

그렇지.”

 

스팬담의 고함에 아이스버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그쪽의 쓰레기 같은 부분까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곤란하거든.”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좋아해. 스팬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좋아해의 연타에 당황한 스팬담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다. 생각보다 귀여운 반응이군. 그렇게 생각한 아이스버그는 턱을 매만졌다.

 

뭐 그렇다고 여기에서 끝낼 생각은 없지만.’

 

그는 조선공인 동시에 노련한 정치가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척, 잠시간의 틈을 준 아이스버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당연히 거절이다!”

 

당당하게 소리치고 사법의 섬으로 돌아간 스팬담이 제 발로 돌아와 사귀어 주겠다며 허락한 건 고작 보름만의 일이었다.

 

시발 그것도 고백이라고!”

 

다 지난 일을 이제 와 울컥한 스팬담은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각설탕이 눈처럼 흩뿌려지는 가운데 처리한 서류와 처리 중인 서류가 한데 섞여 팔랑팔랑 떨어진다. 시발. 뒤늦게 후회했지만, 정말로 늦은 후회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순순히 연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관님, 지금 밖에 워터세븐 시장이...”

 

잔다고 해!”

 

장관님, 시장에게서 전화가...”

 

나 없다!”

 

고백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스팬담은 스팬담이다. 아이스버그가 재계약 취소와 세계정부의 함선건조 취소를 철회한 후, 스팬담은 줄기차게 그를 피해 다녔다. 일차적으로 방문 거절하기부터 자는 척, 바쁜 척, 없는 척. 무시하기까지. 온갖 치사한 방법을 동원한 스팬담은 일종의 우월감이 생긴 채였다. 아무리 거절해도 찾아오거나 아이스버그는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남긴다.

 

그래,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지.’

 

당당히 어깨를 편 스팬담은 위병에게 도개교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오랜만에 산책을 할 작정이었다.

 

무슨 일이냐!”

 

도개교가 무너졌습니다!!”

 

도개교가 무너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랬겠지. 와르르 무너진 도개교와 당황한 위병들 사이에서 홀로 새하얗게 탈색된 스팬담은 이마를 짚었다.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수리했는데!!”

 

수리를 어디서 했는데?”

 

당연히 갈레라....,장관님!”

 

이마에 핏줄을 올린 스팬담은 당장 전보벌레를 찾았다. 꾹꾹. 때리듯 번호를 누르고 기다리자 잠시 후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 워터세븐 시장실...

 

당장 아이스버그 바꿔!”

 

어린 여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분통이 터진 스팬담은 고함을 질렀다. 그 새끼가 감히! 당장 바꿔! 이건 반역죄야! 알아?! 소리를 지르는 그에 반해 수화기 너머는 말이 없었다. 분노를 터트린 스팬담이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자 느리게 눈을 꿈뻑인 전보벌레가 어린 목소리를 전한다.

 

-...시장님은 현재 바쁘다고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짜 이래도 돼요? 엄머, 나는 티라노를 씻겨야 해서 무척 바빠. 전화가 끊기기 직전 수화기 너머로 두런두런 수다가 들렸다. --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스팬담은 두통을 호소했다.

 

아이스버그, 이 개새끼! 반역죄로 쳐 넣어버리겠어!”

 

당장 CP9을 소집해! 소리친 스팬담은 기어코 월보를 이용해 절벽을 넘었고, 도착한 워터세븐에서 저녁만찬(을 빙자한 데이트)을 하고 나서야 문제가 생긴 부분은 무상으로 갈레라 측에서 처리해주겠다는 확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데이트가 한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종종은 그가 찾아가 점심을 함께하기도 했다. 공식석상에 가는 길을 함께하거나 휴일을 함께하기도 한다. 반 협박으로 시작했던 고백과 다르게 아이스버그는 그에게 무언가 강요하지 않았고 스팬담은 금방 거기에 적응했다.

 

애정이 불처럼 따듯한 것이라면 불씨가 옮아 붙는 것은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