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후에.
고요한 밤이 찾아와요. 함께 춤춰볼까요.
[Martin Chalfie / 논커플링]
W.잭모리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점, 마틴 챌피는 시내의 노천카페에 앉아 있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그 카페는 볕이 오래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마틴은 단지 독서를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처럼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식은 지 오래인 커피와 느리게 넘어가는 책장.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고개를 기울일 만한 풍경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의식하지 않아도 흘러들어오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끔찍한 일이라고 표현했던 마틴이었다. 능력이 발현된 열아홉의 이래로 그는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피했고 그것은 능력을 완전하게 컨트롤 하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시내 한복판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자리에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 이상한 광경은 계속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내는 사람으로 북적이고, 카페 또한 드문드문 남아있던 자리들이 빈곳 없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건 그가 앉아있던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카페라....알았어, 알았다고. 핫초코랑 샌드위치나 주쇼.”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맞은편에 앉은 이가 툴툴거리며 주문한다. 마틴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렸다.
“오랜만이에요. 하랑군.”
인사를 건네는 마틴에게 그러게, 하는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어색해 하는 그 태도에 마틴은 손도 대지 않은 쿠키를 밀어주었다. 별로 생각이 없다는 말과 함께 내밀어진 접시에 미심쩍은 표정을 한 하랑이 손을 뻗다가 멈칫한다. 무의식적으로 내민 오른 소매가 비어 펄럭이는 것을 마틴은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배려에 하랑이 다른 성한 팔로 접시를 끌어간다. 마틴은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별일 없었지 뭐. 삐딱하게 앉은 하랑이 쿠키를 우물거리며 제 손가락을 꼽는다.
“음.. 뭐했더라. 새로 살 집도 계약했고 아, 지하연합에서도 찾아왔었어. 함께 지내지 않겠냐고 하던데.”
“그것도 좋겠죠. 당신은 보호가 필요한 나이니까요.”
“얼씨구, 사부랑 같은 말을 하네. 됐어, 그 제안은 거절한지 오래야. 아 재활 훈련도 시작했다.”
하필 오른손이 날아가서 불편해 죽겠다는 하랑의 가벼운 불평에 마틴은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 펄럭이는 소매 안이 빈 것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기억은 어쩐지 아득하다. 마틴은 화제를 돌렸다.
“머리도 잘랐네요.”
“아, 손도 이렇고, 내가 묶기엔 무리잖아?”
아마 이제 기를 일은 없을 거야. 하랑이 담담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뚝뚝 묻어났다.
“어차피 이젠 묶어줄 사람도 이제 없으니까.”
하고 덧붙이는 말은 작았으나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 마틴이 차마 답하지 못하는 사이 주문한 메뉴가 상 위에 놓여진다. 가장먼저 샌드위치를 집어든 하랑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괜찮네. 그 후한 평가에 마틴이 조금 웃었다. 이 카페의 샌드위치는 별로 좋은 맛이 아니고 그가 아는 하랑은 음식 투정이 심한 편이었다.
“그 사이 철들었네요.”
티엔씨가 보면 좋아하겠어요. 하는 뒷말은 따라붙지 않았다. 그러나 생략한 말을 알아챈 하랑이 제 몫의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난 별로 모르겠는데.”
그날. 그랑플럼이 무너졌던 그날, 그의 유년시절도 종말을 맞았음이 틀림없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엔 그들이 잃었던 것은 너무나 크고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 목록에는 티엔과 브루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정말로...”
몇 번을 입을 벙긋거리다 입술을 무는 마틴을 보며 하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무리해서 위로해줄 필요 없어.”
“하랑, 당신은...”
“내 능력, 잊었어?”
그 말에 마틴은 하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북적이는 사람들만큼이나 북적이는 영들 사이 그의 바로 옆자리에, 티엔이 있었다. 무어가 못마땅한지 팔짱을 낀 티엔이 저를 한번 노려보고 다시 하랑에게 무어라 말한다. 지겹다는 듯 귀를 후빈 하랑이 턱을 괴었다.
“안그래도 잔소리가 많던 양반이 죽으니까 더 시끄럽다니까.”
그에 티엔이 무어라 퍼붓고 하랑이 귀찮다는 듯 대답한다. 과거와 같은 풍경이었다. 그것이 조금 안심되어서 마틴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웃었다.
“다행이에요.”
비록 영으로나마 그가 남아있으니 하랑은 외롭고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퍽이나. 대답한 하랑이 조금은 부끄러운 기색으로 툴툴거렸다. 그 안쪽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미안함을 마틴은 모른척했다. 그의 눈으로 보았던 수많은 영들 사이에서 제 곁에서 그가 찾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형씨는, 괜찮겠어?”
하랑은 마틴에게 물었고
“괜찮아요.”
마틴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랑은 그로부터 십여분을 더 떠들다가 돌아갔다. 친한 동료였지만 서로에게 죄책감이 있는 한 오래 이어질 수 없는 만남이었다. 그 짧은 대화에서 주로 마틴이 앞으로의 일을 물었고 하랑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잔이 비었을 때, 마틴은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두번째 손님 또한 그가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