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대AU
입학과 동시에 완공되었다는 예관은 그 자금출처만큼이나 눈에 띄는 외관을 자랑하기로 유명했다. 시야 한구석에만 스쳐도 기어코 다시 돌아보게 만들 정도의 형편없는 디자인. 파울리가 보기에 그 건물은 마치 유치원생이 그린 건물로 만든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엿 같은 디자인을 좋아하거나.
‘혹은 남 엿 먹이는 걸 좋아할 지도 모르지.’
그 녀석들 집안이 후원하는 디자이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지 모른다. 파울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만큼 괴짜 같은 녀석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미 지어진 건물이고, 공짜로 다니는 주제인 그가 건물을 가릴 처지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군말 없이 다닐 정도의 완성된 인격은 아니었던 파울리는 1학년 초반엔 등교할 때마다 작은 욕지거리와 함께 누가 볼까 얼굴을 가리곤 했다. 사나이가 이딴 쪽팔린 건물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는.
‘엄머, 또 집에 안갔냐.’
‘학교가 제 2의 집이라잖아요.’
‘수위한테만 걸리지 마라. 귀찮으니까.’
이제 예관을 집삼아 살아가고 있다. 1년 내내 따순 물이 나오는 시설은 둘째치고, 생김새만큼이나 구조도 괴팍하기 그지없는 건물은 한 달의 대다수를 쫓기는 그에게 유용한 은신처를 제공해주곤 했으니 천국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왕이면 식당도 괜찮았으면 진짜 천국이었을 텐데..”
쩝, 파울리는 입맛을 다셨다. 예관의 학생식당 가격은 기본 만원에서 만오천원 정도의 고가를 자랑했다. 만원치곤 지나치게 호화스런 음식이 제공되었기에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했지만-그게 누구의 취향에 맞춘 것인지 파울리는 굳이 묻지 않았다.- 중요한 건 파울리는 만원을 한 끼에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런고로 그는 주로 편의점 신세를 지곤 했다. 컵라면이나, 삼각김밥 같은 것들..
“아, 컵라면 하나만 먹고 싶다.”
생각하다보니 절로 배가 고파진다. 파울리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머릿속으론 사X면, 너X리, 왕X껑 같은 것들이 스치고 있었다. 그 따듯한 컵라면을 들고 언 손을 데울 수 있다면. 황홀한 상상에 절로 침이 넘어간다. 그러나.
“에쵸!”
현실의 그는 조그만 라이터 불에 언 손을 녹이는 중이었다. 현재 위치, 3층 복도, 창문 아래의 몸 하나 겨우 누일 넓이의 난간 안쪽. 오늘도 파울리는 도망자 신세였다.
시작은 별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학교 앞 호프집에서 근근이 일하며 받은 주급-사정을 아는 사장은 절대로 월급으로 주지 않았다.-은 단 이틀 만에 모조리 탕진한 파울리는 다음 급여를 손꼽아 기다리며 자판기 아래를 뒤지는 중이었다. 하도 훑어 먼지도 별로 쌓이지 않은 바닥엔 다행히 선객이 있다. 파울리는 준비한 마포자루를 좁은 틈새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 번에 힘주어 훑어내자 우수수 딸려 나오는 동전들.
“오예!”
그 사이에서 빛나는 500원을 발견한 파울리는 환호를 질렀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모양이었다. 100원이 두 개, 50원이 하나, 500원이 하나. 도합 750원. 자판기에서 가장 비싼 비타민 음료를 빼곤 모두 사먹을 수 있는 돈이다. 뭘 마실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그 앞에 또각 하이힐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한가해 보이네?”
보기 만해도 비싸 보이는 하이힐의 주인을 파울리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칼리파.”
그 괴짜 패밀리의 홍일점. 음대 여신. 울상과 인상의 그 중간 어딘가의 표정을 한 파울리는 내키지 않는 다는 듯 천천히 일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도도하게 선 칼리파가 안경을 올려 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가해?”
당연히 한가하겠지만 예의상 묻고 있는 거야. 하는 티가 풀풀 나다 못해 넘치는 억양이었다. 한가하겠지? 그렇다고 해. 하는 강요까지 느껴지는 눈빛에 파울리는 슬쩍 발을 뒤로 뺐다.
‘이 녀석들과 얽혀서 좋은 일이 없었단 말이지.’
지난주, 그는 카쿠와 술내기를 했다가 이사장실 안에서 팬티바람으로 발견 되었다. 그 전달엔 재브라가 잠깐 시간을 내달라기에 따라갔다가 데스메탈 사상에 동조하는 친구라고 소개되어 뺨을 맞았다. 그 전전엔 또 뭐더라. 어쨌거나 그러니 저 빌어먹을 CP9악단 녀석들과 얽혀서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은 없는 것이다. 이미 단단히 얽혀버리긴 했어도.
‘그러니까 더는 사양이다!’
그런 결심을 한 파울리는 멍청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한가할 리가 있나! 나도 졸업반이란 말이지!”
“정말? 오늘 일정이 뭔데?”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말과 함께 칼리파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팔락팔락 넘겨가며 오늘 강의도 없고, 아르바이트까지는 멀었군. 하며 남의 일정을 줄줄 꿰고 있으니 등을 타고 흐르는 건 식은땀이다.
“대체 남의 일정은 왜 꿰고 있는 거야!”
“그야, 네 일정을 파악하면 루치가 뭐하는지 알기 쉬우니까.”
“그걸 왜 나랑, 아니다. 됐다.”
아아, 학과장님 저는 왜 저런 놈들과 얽히게 되었을까요. 얼굴을 가린 파울리가 소리 없이 좌절한다. 스포트라이트도 비춰줄까? 칼리파가 장단에 맞춰주겠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들었기에 파울리는 잽싸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저 여자는 정말로 2층 홀 자판기 앞에 조명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가해?”
“바쁘다니까. 아이스버그씨한테 가야해. 자, 그럼 나는 이만.”
죄송합니다. 아이스버그씨. 그렇게 남의 이름을 팔아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앞으로 2층 자판기 앞은 절대 지나다니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파울리의 등 뒤로 칼리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쉽네, 사례는 톡톡히 하려고 했는데.”
“....뭐?”
사례. 사례금. 돈. 단 두글자에 힘차게 내딛던 파울리의 걸음이 멈춘다. 마치 기계마냥 파울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안젤리카, 조율할 때 되지 않았어? 저번에 보니까 C현 하나가 소리 이상하던데.”
“...뭐? 우리 안젤리카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며 칼리파가 고개를 기울인다. 덕분에 결 좋은 금발이 우수수 쏟아지는 모습은 다른 학생들이 보기에 심장을 부여잡을 정도였지만, 파울리의 관심사는 이미 그 밖이었다.
“우리 안젤리카가.. 안젤리카...”
충격을 받아 폐인처럼 중얼거리는 파울리를 보며 칼리파가 쐐기를 박았다.
“많이 바빠?”
그럼 어쩔 수 없지. 안녕.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인사를 건넨 칼리파가 또각거리며 몸을 돌린다. 한발 늦게 파울리가 몸을 날렸다.
“잠까안! 잠깐! 잠깐, 잠깐!”
다급하게 팔을 뻗어 칼리파를 막아선 파울리가 비굴하게 손을 비빈다.
“사례라는 게 정확히...?”
“음, 이 정도?”
걸려들 줄 알았지. 파울리를 움직이게 만들 단어가 세 개 있다면 바로 돈, 아이스버그, 안젤리카였다. 그 중 두 개를 꺼내든 칼리파는 고민하는 척 손가락을 세 개 펴들었다.
“...삼천원?”
“아니.”
“삼만원?”
“아닌데.”
그럼, 거기까지 말을 마친 파울리가 감격에 찬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는다. 그 크게 뜨여진 눈과 쫑긋거릴 것 같은 귀를 본 칼리파는 안경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리고 살풋 웃으며 덧붙였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세상에서 나만큼 한가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온다면 그놈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경쟁자를 해치워서까지 한가함을 증명할 준비가 된 파울리가 당당히 제 가슴을 두드린다. 그런 그에게 칼리파는 오늘의 미션을 설명했다.
‘밤에 파티가 있어. 중요한 행사인데 녀석들 모두 도망갈게 분명하거든. 레슨은 5시까지 풀이고 끝나기 전에 집에서 차가 올 테니까 그 전까지 그 녀석들이 학교에서 못 벗어나도록 이거 들고 도망치면 돼.’
그러면서 건네준 건 지갑 서너개와 자동차 키들이었다. 걸어서 도망갈 놈들은 아니니 돈이 없으면 학교에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게 칼리파의 의견이었다. 물론 혹시 모르니 다른 약점들도 잡아놓았다는 칼리파는 데이트가 있다며 유유히 사라지고, 그 이래로 파울리는 도망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우습게 봤는데..’
아무리 괴짜들이라지만 도망의 천재 이 몸만 할 것이냐. 하는 태도로 학교를 활보하던 파울리의 마음을 돌려놓은 건 그의 사물함이었다. 항아리 우유를 쪽쪽 빨며 계단을 오르던 그는 복도 한 켠에서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인간 바리케이트를 뚫고 들어간 그는 강제로 뜯어진 게 분명한 제 사물함을 발견했다. 어쩐지 제가 알던 것보다 한결 정리되어 있는 사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칼리파가 말했구나!’
파울리는 제 허리춤을 더듬었다. 대충 만져보아도 두툼하기 그지없는 힙색엔 지갑과 키들이 들어있다. 범인들이 찾던 것들은 이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의 사물함을 뜯어?!”
“자자, 비켜주세요. 지나갑시다.”
화내기 무섭게 새 캐비닛이 도착했다. 심지어 더 좋아 보인다. 분노의 방향을 잃은 파울리는 뻘쭘하게 새 캐비닛에 제 물건들을 옮겨 넣었다. 파울리가 캐비닛 앞에 있다는 제보를 듣고 카쿠가 달려오기 전까지만. 그 후로..
“파울리 못 봤는감.”
도망치고.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고 했는데.”
“한발 늦었군.”
또 도망치고.
“짜바랍! 파울리 팬티는 하얀 삼각팬티다!!”
“웃기지마! 파란 사각팬티라고!”
“저기다! 잡아라!”
또 또 도망치며 버텨온 것이다. 그렇게 도달한 난간에서 파울리는 언 팔을 비볐다. 초가을이라지만 바람 부는 그늘에서 느끼는 날씨는 초겨울 못지않다. 그런 그늘 안에서 한 시간 반째 체류하던 그는 코를 풀어낸 휴지를 보며 이것들을 태워 모닥불을 피우면 안 되는 걸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파울리는 순간 토끼마냥 쫑긋 귀를 세웠다.
-자박.
라이터를 끄고 숨을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3초. 파울리는 한껏 몸을 낮췄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구먼.”
카쿠였다. 가벼운 러닝화 소리의 주인인 그는 복도 끝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카쿠가 노인네 같은 건 말투뿐만이 아니다. 감도 노인네들처럼 귀신같아서 벌써 몇 번이나 그를 달리게 한 카쿠의 등장에 파울리는 아예 숨까지 멈췄다.
‘얼른 지나가라..’
언제 얼었었냐는 듯 손아귀엔 식은땀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파울리의 바람과는 달리 카쿠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웅웅-거리는 진동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느리게 걷던 카쿠의 걸음이 아예 멈춰버린다.
“전화 받았다네. 뭐? 거기도 없어?”
사람까지 써서 찾고 있는 거냐! 파울리는 어이가 없어 소리치려 했던 입을 틀어막았다. 덕분에 합.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카쿠에겐 닿지 않은 모양이다.
“알겠구먼, 찾으면 바로 다시 전화할 테니까.”
골치가 아프다는 듯, 말꼬리를 늘어트린 카쿠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이 걸려 아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사라지고 난 후에야 삐죽 고개를 내밀어 텅 빈 복도를 확인한 파울리는 슬쩍 복도로 발을 디뎠다. 슬슬 다음 은신처를 찾아야겠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그래서 파울리가 향한 곳은 학장실이었다. 아이스버그씨는 사실 그제부터 출장 중이라 학장실 문은 잠겨있으니 설마 거기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하리란 계산하였다. 물론 문이 잠겨있다는 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지만.
“13레슨실 난간은 학장실까지 이어져있단 말씀.”
그리고 아이스버그씨는 창문을 잠그지 않는다! 학장실 창밖에 도달한 파울리는 역시나 손쉽게 열리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제야 따듯한 방에서 몸 좀 녹이겠네.”
처음부터 여기에 있으면 들킬까봐 일부러 바깥에서 시간을 지체한 파울리였다. 캐비닛도 뜯어낸 녀석들한테 열쇠 빌려오는 것쯤이야 간단하겠지. 그러니까 긴장이 풀렸을 지금 여기에 숨는다! 파울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창문을 닫았다.
‘따듯하고, 먹을 것도 있고, 커피향도 좋고...잠깐 커피향?’
머리를 때리는 경고에 그는 반사적으로 다시 창문으로 열어젖혔지만, 그보다는 목소리가 빨랐다.
“멈춰.”
“.....젠장.”
빙글, 비어 있어야할 의자가 돌았다.
“생각보다 3시간 45분 늦었군. 바로 이리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검은 가죽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있던 루치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하하하.”
파울리는 고민했다. 도망을 가느냐. 자진납세를 하느냐. 도망을 가느냐. 자진납세를 하느냐. 그에겐 잡혀선 안 될 절대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리 불쌍한 안젤리카. 칼리파는 안젤리카의 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그녀는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다.- 파울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젤리카를 지켜야했다. 조율을 받으려면 한동안 바짝 돈을 벌어야한다. 그러니까 도망이다!
“그럼 안녕!”
파울리는 잽싸게 창문을 넘었다. 넘으려고 했다. 창문이 눈앞에서 닫히지만 않았더라면.
“어딜.”
“으악! 이 자식! 손이라도 찧었으면 어쩌려고! 싸우자는 거냐!”
용케 창문이 닫히기 전에 손을 잡아 뺀 파울리가 제 손가락을 확인한다. 하나,둘,셋,넷, 열 개가 모두 제대로 붙어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모습을 루치가 한심하단 얼굴로 응시했다.
“키랑 지갑 내놔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키랑 지갑을 왜 나한테서 찾아.”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모르쇠로 일괄이다. 언제 손가락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파울리를 보며 루치가 바짝 다가섰다. 직접 찾아내겠다는 기세에 파울리가 냅다 창문에서 떨어져 도망쳤다.
“아, 나는 모르는 일이라니까!”
“편의점에서 내 카드 긁은 거 문자 왔다.”
“하하하, 어떤 간 큰 놈이 네 카드로 먹을 걸사냐.”
“카드 내미는 네 모습이 CCTV에 찍혔는데 말이지?”
그걸 또 들켰다니 젠장. 파울리는 블랙카드에 휘둥그레져 일주일치 식량을 질렀던 자신을 원망했다. 의자를 사이에 두고 빙글빙글 돌며 변명하던 파울리가 뒤통수를 긁었다.
“칼리파한테 수고비 받으면 갚을 테니까!”
제 입으로 칼리파의 사주를 받았음을 실토한 파울리가 합, 입을 다문다. 네 놈 맞잖아. 루치가 눈썹을 찌푸렸을 때였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먼.”
“그러게.”
복도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파울리의 안색이 파리하게 굳는다. 루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억!”
의자를 잡아당겨 생긴 틈으로 다리를 뻗은 루치가 파울리의 정강이를 후려 찬다. 고통에 허리를 숙인 그를 책상 밑으로 우겨 넣은 것과 학장실 문이 열리고 카쿠가 들어온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여기 안 왔는가.”
“아직도 못 찾았나보지.”
텅 빈 학장실을 휘 둘러본 카쿠가 실망스러운 얼굴을 한다. 그런 카쿠를 핀잔하듯 말을 건넨 루치는 한 점 거리낄 것 없는 표정이었다.
“사람까지 푼 것치곤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은데.”
“도망치는 데는 선수니까 말이여.”
“교내 방송으로 엉덩이에 점이 있다고 까발렸는데 나오지 않았다. 짜바랍.”
내 엉덩이에 점 따윈 없어! 책상 밑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파울리를 루치가 발로 밟아 누른다. 그러나 덜컹거린 소리까지는 감추지 못해 나가려던 카쿠가 도로 뒤를 돌았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나?”
묻는 카쿠에게 인상을 쓴 루치가 벌레가 있어 밟았다며 뻔뻔하게 변명한다. 벌레가 된 파울리가 작게 꿈틀거렸다. 종아리를 움켜쥐는 손아귀 힘에 루치의 눈썹이 떨린다. 다행히도 카쿠는 그 반응을 루치가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듯 했다.
“소독업체를 한번 부르는 게 좋겠구먼, 벌레가 있다니 피아노에 닿기라도 한다면 끔찍하니께.”
“그건 그렇지.”
“그럼, 다시 찾아보러 갈 테니 오면 바로 연락 부탁하구먼.”
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혀를 끌끌찬 카쿠가 이러다간 정말로 칼리파에게 끌려가게 생겼다며 발을 재게 놀린다. 그 뒤를 따라 후쿠로가 문을 닫고 마침내 발소리까지 사라졌을 때서야 루치는 허리를 숙였다.
“어이.”
“벌레한테 말도 시키냐.”
“얼마를 받았다고?”
벌레마냥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던 파울리가 그 말에 번뜩 고개를 든다. 네가 줄 거냐. 얼마나 줄거냐. 조금 더 줄지 모르니 더 높게 불러볼까 고민하는 머리통을 보며 루치가 칼리파에게 물어 보겠다며 못을 박는다. 하는 수 없이 파울리는 제가 받기로 한 돈을 이실직고 했다.
“30.”
“그보다 더 주지.”
“...진짜냐!”
단번에 화색이 돈 파울리가 고개를 들어 올려 루치를 올려다보았다. 기대감 때문인지 상기된 얼굴. 그런 그에게 찾아든 건 루치의 손가락이었다. 허리를 숙인 루치가 엄지로 파울리의 입술을 쓸어내린다. 어 이게 아닌데. 하고 그가 입을 벌린 순간엔 입술이 찾아들었다.
어울리지 않게 뜨거운 혀가 입안을 더듬었다. 느리거나 혹은 빠르거나. 제멋대로 박자를 바꾸어가며 변덕스럽게 구는 것도 그랬다. 파울리가 아는 로브 루치는 가장 낮은 음으로 악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연주를 하는 놈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울리는 그 키스 방식이 꽤 그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원래 제멋대로인 놈이지.’
입술을 겹친 채 조금 웃자, 그 사이 단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은 루치가 불만스런 기색을 표한다. 웃음조차 집어삼키겠다는 듯 혀를 옭아맨다. 겨우 맞추던 장단마저 놓친 파울리가 휩쓸려가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심장이 뛰는 것인지, 숨이 막혀 그러는 것인지 모르게 될 무렵,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는 것을 끝으로 떨어져나간 루치가 허리를 세웠다. 입안에서 열기가 옮아간 것인지 그 입술까지 붉다. 잠시의 침묵 후 파울리가 입을 열었다.
“설마, 이게 30만원이라는 건 아니겠지?”
루치가 움칠 몸을 떨었다.
“내 키스를 고작 30만원짜리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불만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는 얼굴이 정곡을 찔려 쪽팔린 모양새라는 걸 알아챈 파울리가 파안대소하다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루치의 한심스럽다는 시선이 머리위로 떨어졌지만 파울리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술이라도 마시러 갈까. 칼리파가 뭐라고 하면 어쩌지.”
“상관없어. 본인이 가지고 갈 수도 있는 걸 네 녀석한테 맡겼다는 건 나보고 나머지를 책임지고 파티로 보내라는 거겠지.”
“아, 맞다 안젤리카. 네가 듣기에도 음이 안 맞는 거 같냐.”
“글쎄.”
“제대로 기억해봐라 좀.”
루치의 전화엔 차곡차곡 악의에 찬 부재중이 쌓인다. 어깨동무를 한 둘은 호프집으로 향했다.